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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by justit


인간의 삶에는 왜 고통이 지속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유한한 존재가 그 너머에 닿고자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반증하기도 하지만, 유무한 사이에서 지속적 원환을 낳는 바로 욕망의 개입 때문일 것이다. 욕망은 유한한 존재가 그 한계를 뚫고 무한에 도달할 가능성 같은 환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근본적 한계를 깨닫는 순간,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이런 것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한, 도달 불능의 욕망은 지속적 불행에 연결될 뿐이다. 예를 들어 A가 간구하던 희소품을 획득하면 얼마간은 행복해진다. 주변에서도 이런 A의 능력을 부러워하거나 질투를 느끼며 심한 경우 저주를 퍼붓기도 할 지경이다.
그러나 곧 새로운 희귀품이 나타나고, 이번에는 A보다 월등한 사람에게만 그 소유가 허락된다면, 이번에는 A조차도 고통과 불행으로 전락한다. A같은 사람이 그를 탈출하는 일은 권태를 느끼거나 아예 관심을 갖지 않고 타인과의 비교를 끊을 때 일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갖는 생각은 외적.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절대적 만족을 추구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고독'은 상대 비교로 비롯되는 자기 수축을 경계하자는 것일 게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훌륭한 사람이 그런 정도의 굳건한 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예 전적으로 고립된 세계에서 살거나, 세상사는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밀쳐내는 강한 도덕주의자가 아니면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도 그것은 여전히 일시적 위안거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냥 따라하기에는 실천성이 의심스럽다. 안됐지만, 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도 사실은 흔들리는 사회인들을 위한 자기계발서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가 남긴 사상은 그저 실용적인 것에 관한 것은 아니다. 그의 요점은, 행복과 불행간 자기 중심을 잡는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의 조건을 흔히 타자와의 비교에서 찾는다. 그것도 자연스러운듯 상류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불행하다. 하지만 그 기준점을 하향한다면
행복은 오히려 가까이 있다.
큰 건물이 무너지는걸 지켜 본 어느 거지는 아들에게, "우린 저런 걱정이 없으니 얼마나 좋아! 다 아빠를 잘 둔 덕택이야!"하는 희비극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이 모든 것을 초탈한 성인이나 갖춤직한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고통을 줄이라는 편이 보다 와닿을 것같다.
고통이 행복의 과정이라면, 그 조차 없앰으로써 양자를 저울질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저자는, 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고 표제를 붙였을까?
40세, 불혹의 나이이다.
그 때는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는 시기를 말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야 나이도 인플레되어, 지난 세월을 85%로 환산하는 광고 문구도 있다. 말하자면 공자 시대의 40세가 지금은 기껏 34세에 상응할 뿐이다. 그렇더라도 기대수명이 80이라면, 40은 여전히 인생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이렇게 보면, 공자 시절보다는 제 중심을 잡아야 하는 실질적 시기가 더 앞당겨진 셈이다. 기대여명이 60세이던 그 시대에 인생의 2/3 지점이, 80인 지금은 중간점에서 중심을 잡을 것을 이르니 말이다. 그 때보다는 세상이 훨씬 복잡해졌으니 그 시기가 앞설 이유도 충분히 납득은 간다.
그만큼 숫자상 나이보다 더 젊게 생각하고 성숙하게 행동하라는 뜻일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 왜 하필 '쇼펜하우어'일까?
알다시피 그는 헤겔같은 철학자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으며, 그 악영향이 있었을까?
그는 염세주의자이며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긍정의 철학자였다.

사실 힘든 세상에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은
'살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것의 반어법이다.
만일 벼랑에서 생을 끝내려는 사람에 냉정하게(?)도 "그럼 그러시죠"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물론 그럼에도 스스로 삶을 종결시키는 사람도 있다. 삶의 고통을 못견뎌 죽음으로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에 쇼펜하우어는 "그럼 그렇게 하시죠"를 제시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우리는 그가 생물학적 끝냄을 권유한 사상가라고 오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징적 자살, 상징적 죽음.
그런 상징적 마감을 통해 갖은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인간이 영원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런 측면에서 인 것같다. 40은 바로 이런 죽음 충동을 심각하게 사유할 시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나이 40에 그런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은 없고, 거꾸로 타인의 인정에만 목말라 했다. 그러고 보면, 나이 '마흔'은 이미 흘러간 과거인 것 만은 아닐 듯하다. 그 나이는 내내 도래를 유보하거나 오히려 지금 현재가 그 마흔이니 말이다. 따라서 행복은 미래에서 찾을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지금'에 충실할 일인 것 같다. '마흔' 자체는 인생 전체에서 고정된 한 시기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현재하는 나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성장하지 못한 사람에겐 성장을 향해, 미성숙한 사람에겐 성숙을 준비하는 상징적 나이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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