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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by justit

타인에게서 인정을 받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가 설정한 기준이나 수준이 타자의 그것과 충돌하니, 그것의 합치를 구하는 일이 어디 수월하겠는가?
그렇더라도 상황을 놓고 보면 다시 납득하기가 어렵다. 이런 정도이면 충분히 상대를 납득시키고 지지를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데에도 말이다. 물론 이에는 다시 제삼자의 이해 개입이 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보편은 아니더라도, 일반적 수긍 단계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고개가 흔들어지는 것이다. 다수의 긍정적 판단을 받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많을 터.
그렇다면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결국 광범위한 일반의 시선에 눈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 여전하다. 개인적 편견을 떨치기 힘들다.
어느 대중매체 드라마를 얼핏 본 적이 있다. 일상사에서 골치 아픈 이야기는 고맙지만 사절이다. 온종일 노동에 지친 일상이 머리 아픈 철학 따위에 눈과 귀를 허용할리는 만무하다. 그저 지나며 던지는 농담, 타자의 실수에서 벌어지는 웃음거리...
이런 소소한 이야기에 하루를 달래는 게 낫지, 사람이 어떤 존재여야 하느냐, 왜 사느냐 하는 문제를 들추는 건 몸만 더 피곤해진다. 그래서 위로는, 남도 나보다 더 나은 게 없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기중심은 점점 궁핍해지고, 오직 단조로운 쾌락 중심이다. 어느 한 주제를 놓고 깊이 빠져드는 내용은 좀처럼 접하기 힘들다.
드라마 따위를 보면, 청춘 남녀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연유로 사랑에 빠질지는 뻔히 보인다.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그는 어김없이 허리를 감싸 쥐고
추락에서 받아낸다. 그런 상투적 장면이 펼쳐진 후에는 스토리를 이어 갈 소재가 쪼그라든다. 그래서 뜬금없이 과거나 미래에서 온 그/그녀가 시공간을
확장한다. 이조차 요즘은 흔해 빠진 설정이 된 지 오래이다. 가볍게 외피만을 훑고 지나가도, 소재 거리를 찾아 머리를 싸매는 일은 당분간 면제받는다.
말하자면, 과정이나 결과가 훤히 내다보이는 전개가
일반의 정서에 들어맞는 것이다. 이를 나무랄 특별한 계기는 없다. 그런데 어째 씁쓸하다. 그런 취향에 반응하지 못하면서 타인, 제삼자, 결국 일반의 지지를 구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보인다.
한 때 익숙하지 않은 지명, 인명, 생활 습속이 지루하게 등장하는 내용이 대단하다는 착각을 한 적이 있다. 일단 내게 편하지 않으면 수준 높은 저작이라는 착오를 갖다 붙인 것이다. 여기에는 이해가 어려운 해석이 단단히 한 몫한 것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튼 그랬다.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고, 다시 더듬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종류는 일반의 손에 가볍게
쥐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먼지가 쌓인 채 뒤편에 놓이는 것들이다. 누구의 지지를 받는 일에서
멀어지는 것은 그런 이유를 갖기도 한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맺는 한, 자기만의 인정에 그치는 것은 분명 아집이고 독선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려니 타협이 필요하다. 하지만 끝내 이를 비켜가지는 못할 것이다. 차라리 타자의 인정을 부정하는 일이 진정 인정받는 것이라도 되는 듯, 계속 거리를 두게 될 것이다.
"A 씨! 푸념은 충분히 받아들입니다. 이런 인정이라도 괜찮은 것이면, 귀하에게 여전한 지지를 보냅니다."
'A 씨' 어째 점잖지 못한 호명으로 그를 소환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그 자리를 고집할 것 같다.
상투어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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