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언제나 묵묵하다. 말없이 서 있는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힘듦을 버티고, 계절의 흐름 속에서도 언제나 점잖다.
이 겨울, 산은 이미 허허롭다.
볕이 좋은 날이면 산은 햇살에 스며든다. 그러나 바람이 거센 날이면, 나뭇가지들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몸을 구부린다. 점점 얼어붙어도, 두툼한 잎사귀의 덮개조차 떨쳐내며 벌거벗은 채 겨울을 받아낸다. 산은 혹독한 계절과 맞서면서도, 모든 것을 털어낸다.
허리를 잔뜩 굽힌 산은 상승을 꿈꾸는 운무(雲霧)를 감싼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서로 뒤엉켜 한바탕 雲舞(운무)를 펼친다. 그 율동은 흩날리지만, 농염한 교태 속에 힘 있는 동작이 있다. 마치 해안을 스치는 파도의 파문처럼, 산의 몸은 높이 솟았다 오므라들며 쉼 없이 자신을 조율한다.
산은 하루를 맞는 특별한 의식을 지녔다. 태고의 하루는 여기, 지금에도 무대를 옮겨 온다.
햇살, 바람, 안개, 잎사귀 하나하나는 저마다의 무희로 하루를 연다. 가지들의 갈채와 바람의 환호가 잦아들면, 삶이라는 무대는 새 장을 펼친다.
열어젖힌 장에는 또 어떤 풍경과 사연이 우리를 기다릴까.
간밤의 여운은 산과 숲, 들판 위를 떠돈다. 붉게 물든 단풍잎은 팬레터처럼 흩어지고 쌓이며, 수줍게 붉은빛을 머금는다. 하지만 산은 침묵 속에서도 결코 고요하지 않다. 그 침묵은 생명들의 숨결과 움직임을 품고, 내내 변화하며 노래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새벽이 오기 전, 알을 품던 산꿩이 날기 전, 안개와 구름은 이미 자신만의 율동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혹은 팔을 쭉 벌린 산이 신비한 리듬을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일까?
저수지 저편에서는 물안개가 오른다. 물 위를 덮는 안개는 산의 숨결처럼, 한 풀 한 풀 풍경을 덮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읊조린다. 햇살이 부딪히면 빛의 파편이 흩어지고, 바람이 스치면 안개는 유영한다. 산과 안개, 바람이 함께 만드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 숨결과 율동을 호흡한다.
산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끝없는 속삭임이 흐른다. 나뭇가지 하나, 흙냄새 한 줌, 물안개의 부드러운 흐름에도 자신은 그 속에 있다.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매서워도, 산은 모든 것을 품는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숨결을 느끼며, 산은 침묵 속에서 하루를 맞고, 또 하루를 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