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을 떠난 걸로 치면 태어나 처음이었다. 다소 늦은 나이로 입대했다. 8월의 여름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어머니는 동네 입구까지 하염없이 훌쩍거리시며 아들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훈련소까지 따라오겠다는 것을, 친구가 그곳까지 동행하기로 했으니 그냥
여기서 헤어지고, 첫 휴가 때 다시 뵙자고...
얼굴이며, 팔이면 드러난 피부는 죄다 검은색으로 변하고, 그렇게 8주간을 논산 훈련소에서 보냈다.
소위 카투사병, 자대 배치 전 미군과의 생활을 예비하는 별도 3주간의 교육훈련 시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과정을 마친 나는, 평택에서 평택으로 배치되었다. 입대 동기 3명과 터덜터덜 대대를 찾아 간 우리. 전 대대가 야전 훈련 기간이라, 대대 본부에서는 당시 신병들에게는 상상도 하기 힘든 1박 2일의 외출증을 발급해 주었다. 하늘을 난다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동료들과 캠프롤 벗어난 나는, 평택역에서 군용 열차에 올랐다. 신세계를 만난 듯, 부산진역까지 운행하는 기차보다 내 마음이 더 빨리 달렸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 가족들은 첫 휴가를 나온 나를 눈물로 맞았다.
2.
"외출을 허용한 것이니, 눈치 없이 늦게 귀대하면 안 됩니다. 대대 전체가 작전을 나간 터라, 복귀하면 스트레스를 풀 대상을 물색할 것이고, 그러면 괜한 희생양이 될지도 몰라요!"
실상으론 불과 간 밤의 몇 시간을 집에서 보낸 것에 불과했다. 다시금 평택으로 향하는 군용 칸에 몸을 투척한 나는, 새롭게 맞이할 걱정에 자리가 편치 않았다. 아마 그 기차 편은 역이란 역은 다 들러는 완행열차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집으로 향하던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빠르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치피 기차 속도와는 관계없이 복귀할 시간은 정해져 있음에도 그러했다. 지금은 SRT로 대전에서 내려, ITX로 환승해 평택역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나는 군용 칸을 이용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3.
기차가 마찰음을 일으키면서 요란하게 멈춰 섰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을 데리고 휴가를 나왔다.
"그래, 얼마를 사귀었다고?"
"대학 1학년 때부터였으니까, 역산하면 4년 가까이 됩니다"
"그럼에도 헤어졌다니 안 된 일이긴 한 데, 어쩌다가?"
그는 쉼 없이 4학년까지 마치고 입대한 친구였다. 키가 꽤나 컸고, 힘도 센 편이라 턱 밑까지 바짝 붙으면 미군들도 찔끔거리는 것이었다. 그는 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녀와 교제를 지속해 왔다. 그러던 일이,
어느 날 파국을 맞게 되었다. 속칭 말하는 교회 오빠와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말로만 듣던 고무신 거꾸로 신는 이야기를 여기서 듣다니?
"그래서 어떡하려고?"
"얼마나 잘 될지 모르겠지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경부 라인의 중간에 집이 있던 그는, 그가 내릴 때까지는 같은 열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별 경험이 없던 나는, 그렇다고 특별히 해줄 만한 조언도 없었다.
다만 그의 사정에 동조해 주면서, 위로를 전달해 주는 것 밖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