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유라는 이름

by justit

1.

요즘은 길거리를 가다 보면, 유모차에 아기 대신 강아지가 타고 있는 모습을 많이 접한다. 강아지들도 '아기'라고 부르는 마당에 이상할 건 없다.
그 기구는 창의력을 발휘해, 걷기가 불편한 노약자들에게도 좋은 조력물이 된다. 그런데 그것에 고양이를 싣고 가는 장면은 본 일이 없다. 바깥에 데려 나오면 탈출할 가능성이 개보다는 더 높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암튼 길 가다가 유모차를 보면,
어떤 귀여운 아기가 산책을 나왔을까 하고 보면, 강아지가 타고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보는 것 같다. 이 개들은 데려 나와도, 주인으로부터의 해방보다는, 보호가 더 안락하다는 것을 계산에 넣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반강제로 독립을(?) 얻고서도 옛 주인을 찾아 천리 길도 달린다. 사람 입장으로 자유냐, 속박이냐를 가르는 것이니 개가 돌보는 사람에게서 떠나가지 않는다고 예속을 좋아하는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그 비슷한 종인 늑대는 그런 상황에 처하면, 끊임없이 해방을 꿈꾸며 자연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것이다. 날마다 겪는 먹이 구하기, 천적으로부터의 위협 등을 감수하고서도, 늑대에겐 그것이 자유일 것이다.


2.
만약 자유라는 것이, 일방적 보호에서 탈피해, 신체적인 것 만을 의미한다면, 개는 숲 속으로 놓아주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알다시피, 인간에게 자유란 그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기 생활 도구를 마련하지 못한 경제적 비자유는, 신체의 자유가 오히려 구속이다. 정도의 차이 나름이겠지만, 기본적 자유는 물질적 토대가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자유가 한층 확대된 것 같지만, 별 쓸모없는 자유로 전락한다. 인간의 눈으로 봐서 그렇지만, 유모차에 탑승한 강아지는, 철저한 복종을 통해 자유를 얻고 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자유든 무엇이든 형식적인 것보다는, 실질적인 것이 중요하다.
실은 같은 내용이겠지만, 자유, 민주, 자본주의가 결합한 곳에서는, 실질이 담보되지 않는다. 미국 슬럼가의 흑인 빈자가, 티베트 라다크 주민보다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 노숙자는 양식을 얻어먹고, 양담배, 간혹 양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교점을 놓으면, 우리나라 부자도 매일 양식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유모차를 타는 개는, 운전사가 딸린 자가용도 있다.

3.
어린것들이 모두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개가 누리는 혜택은 시기하면서, 개보다 못하다고 자탄하는 냉소 자체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자유는 잠깐만 뒤돌아 보면, 파시즘의 이면이기 십상이다. 모두를 자유룹게 해 주겠다는 구호쯤은 파시즘에도 얼마든지 있다. 방법이라면, 실질적 평등을 추구하는 방법에서의 강압성이다. 그러나 그런 억압은 감수하기 즣은 강제이다. 어차피 굶어 죽을 바에야 어떤 것이 그것을 초월할 수 있겠는가?
자유는 굶어 죽어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목숨 건 현상에서는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자유는 그것이 얻어지는 순간, 금세 권태로워져 탈출선을 타기 쉽다.
요즘의 세태가 전체주의로 향하고 있다고 말하면, 심각한 비난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국. 이스라엘 할 것 없이, 그리고 기존의 전체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움직임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독재자 아래에서는 배운 게 독재 밖에 없다고 하듯이, 대학살을 겪은 민족이 저지르는 일이 대학살이다.
자유를 선도한 나라에서도, 전체주의적 망령이 되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자유를 놓아주는 자유, 전체주의를 허용하는 자유가 자유는 아닌 데, 경제체제와 연결된 이 자유는, 단지 선택의 문제로 전락한 듯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작은 것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