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상이란 게 얼마나 뻗칠까? 경험해 보지도 않은 것조차 상상에서는 가능하다. 꿈에서나 꾸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현실로 전환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순수하게 상상으로만 머무는 것도 많다. 현실은 늘 충족되지 않고 미완으로 굴러가니 상상이 개입할 수 밖에는 없다. 밤에 꾸는 꿈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것이라면, 낮에 꾸는 것은 의식이 작용하는 것이다. 역사가 낮에 꾸는 꿈같은 것이면, 소설은 밤에 꾸는 그것이다. 양자는 물론 허황한 게 포함된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낮에 꿈을 꾸라는 것이다. 세상은 우연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구성해 나가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양자의 꿈은 하나같이 보기 좋은 모습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꿈조차 꿀 수 없는 존재는 역사의 바깥에 있었다. 밤에 잠을 잘 자리가 없는 사람은 허황한 꿈조차 꿀 수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꿈을 꾸라고 말한다. 그나마 그런 기회나 자리라도 있으면 모르겠는 데, 깨어 있으라는 것은 환상조차 앗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깨어 있으라는 갓은 역사의 변혁에 눈뜨고 그것을 맞이하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임에는 이의가 없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꿈을 꾸는 사람만 그러하다.
2. 사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은 맞다. 다리 밑 천막에서 지내든 100층 높이에서 한껏 내려다 보고 살든, 사는 건 사는 것이다. 다만 꿈이 다르다. 100층 높이에서 사는 사람은 그보다 늪은 구름 위 세상을 꿈꿀까? 노숙하는 사람은 100층에서 사는 꿈을 꿀까? 그 경우 확률은 노숙자에게 더 크다. 출발이 바닥이니 아무 잃을 게 없다. 그러나 100층 거주자는 잃을 게 많다. 그 층고에서 추락이라도 하면 세상과는 결별이다. 그러니 꿈을 꾼다는 것은 새가 날아가듯이 몸이 가벼워야 한다. 새는 창공을 자유룹게 나는 듯 보여 자유, 꿈의 비상을 상징한다. 참 묘하다. 꿈을 꿀 수 있으려면 가진 게 없어야 한다. 그런데 꿈의 목적지는 타인과 달리 빛나는 그 무엇이다. 누구의 부러운 눈빛을 받아 반짝거리지 않아도 자신이 원하는 일상을 만들어 그것을 꿈의 실현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흔하긴 하다. 그렇다면 꿈은 타인의 인정과 부러움만을 내용으로 하지는 않는다.
3. 새가 비상해 날아가는 곳은 새로운 서식지이다. 상징은 그렇지만 현실은 크게 다를 게 없다. 있다면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고난 끝에 새는 생명을 어어가고 알도 낳는다. 고된 삶에 비해서는 참 소박하다. 그러나 숭고하다. 꿈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시베리아 벌판에서 낙동강 습지로 날아드는 철새는 꿈, 자유라는 상징, 겨울을 나기 위한 이동 같은 이미지, 현실적 필요를 모두 떠나 장엄하다. 꿈은 의도나 결과를 가지고 지칭할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숭고함을 두고 말해야 할 것이다. 새가 온몸을 비우고 가볍게 날아오르듯, 하천 바닥에서 100층 건물을 올려보듯 낮에 꾸는 꿈이든 밤에 꾸는 것이든, 많은 것을 덜어내는 것에서 꾸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