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꽤 무더워졌다. 오랜만에 인근 야산에 오른다. 지난겨울 보아 두었던 춘란 자생지가 문득 떠올라, 아침부터 마음에 어른거렸다. 제법 긴 시간이 지났지만, 한때 춘란 채집에 집착하다시피 할 때가 슬며시 떠올랐다. 주말이면, 평소 출근할 때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 아내의 새벽잠을 흩뜨려 놓는 것이었다.
”공부나 다른 일을 했으면 남는 것이나 있지. 그 x의 풀 쪼가리에 미쳐서는,,,“
아내의 이런 푸념은 온 산을 헤집으며 그들을 만날 상상을 하면 충분히 감내할 잔소리였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온종일 이 고개 저 언덕을 뒤적거려도 소위 족보 있는 개체를 만나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럴 때면, 평범한 개체, 혹은 멀리서 보면 춘란 비슷한 맥문동 같은 것에 애꿎은 화풀이를 했더랬다. 지금은 그 열기도 식어, 춘란이라고는 겨우 예전에 기념품처럼(?) 가져다 놓은 밋밋한 몇 촉만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지난겨울에 스쳐 갔던 난초가 생각났던 것이었다.
”여태껏 그랬듯이, 뭐 별 것 있겠어? 범위를 넓혀 그 주변도 한 번 살펴봐야지. “
말은 그랬지만 혹시 모른다는 내적 기대를 안은 채, 그다지 높지는 않은 산에 들어섰다.
”분명히 이 부근이었는 데…. “
지난겨울에 비해서는 이런저런 풀들이 많이 덮여, 주변 형상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다시금 이곳저곳을 더듬어 봐도, 난이 자라던 자생지가 눈에 띄지 않는다. 거미줄을 헤치고 가시덤불에 가볍게 긁히면서 속속들이 훑어봐도 춘란은 보이질 않는다.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이런 개체조차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담! “
하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려 나무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곳엔 입구에 절 하나가 서 있는 곳이다. 잠시 땀을 식히기 위해 편편한 돌을 찾아 앉았다. 바람이 시원하다. 그러면서 나는, ”나에게 운 좋게 눈에 띄면 잘 돌봐 줄 건 데, 이젠 민춘란조차도 구경 못하다니! “ 하고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숨을 돌린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런데 숲 속으로 향할 때는 보지 못했던, 팻말에 쓰인 글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깨닫는 것이다. 감사는 만능의 약이다. [봉림사 포교사회 각명]’
‘행복이 그런 것이면, 기왕에 가진 것도 별로 없는 데, 거기서 무엇을 깨닫는 것이란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난 쪼가리나 한 촉 얻을 요량으로 이 산에 올랐고, 지금은 그냥 꽃이나 피는 게 더 낫다는 심정으로 별 볼 일 없는 난초 두 촉을 갖고 있을 뿐인데, 만약 뜻밖의 변이종을 얻었더라면 나는 쾌재를 질렀을 것이고 그 행운에 하루가 얼마나 행복했으려고?‘
’그런데 그 대신에 집에 가지고 있는 이 쓸모없는(?) 푸르죽죽한 난초에 감사하고 깨달음을 얻으라니?‘
별로 공감되지 않는 이 문구에 대해 나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상념에 이르렀다.
’ 만일 난초 꾼이 어떤 희귀종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오롯이 자신의 소유만으로 할 때는, 그것은 단지 자신만의 독점적 기쁨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두면, 또 다른 우연성으로 발견한 사람, 심지어 난초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자태를 즐길 수 있게 할 것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자는 의미보다는, 행복을 공유하는 범위가 그만큼 더 넓어질 것이 아닌가!.‘
지난 3월엔 집사람과 함께 법정 스님이 계신 불일암을 방문한 적이 있다. 무소유의 길을 지나 그 암자에 다다르는 길은 제법 험난했다. 아마도 스님께서는, 그 의미를 스스로 깨닫는 일이 그리도 지난함을 알려주고 계신 것이리라. 아내와 나는 그 이튿날 무리한 일정으로 몸살이 나고는, 동시에 자리 보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듯이, 우리는 소유양식에만 익숙했지, 존재 양식은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행복은 주로 물질적 소유에서만 추구하고 마음의 행복은 뒷전으로 한다. 따지고 보면, 권력, 사회적 지위, 명성, 물질적 부 등 무언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불행과 불운을 일컫는 것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되돌아보면, ’이미 가진 것을 깨닫는 것에 있다 ‘는 것은 가지는 것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내 손아귀에 왜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때, 그래서 그마저 비워낼 수 있을 때 바로 그러하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법정 스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몸소 실천하시고, 소유와는 떨어져 그늘이 되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후박나무 아래로, 본래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행함을 보여 주셨다!
결국, 행복은 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불행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약간의 가진 것이라도 그것이 나와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더 나아가 비울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소유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 최소한’이라는 수식어일 때 아름답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을 지키는 것에 불안해하며 누군가 자기 것을 침해할 것 같은 경계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은 이웃을 의심하며, 끊임없이 자신만의 성을 쌓고 경쟁하는 태도로 말미암아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행복은 가멸찬 추구의 몸짓보다는, 이런 조그만 비움의 실천에서 찾아지는 게 아닐까?
여전히 행복이 무얼 말하는지 알기에는 부족하지만, 이런 소소한 일상의 실천이 그것을 깨닫는 계기 속에 있음은 알 듯하다. 그래서 작은 일이지만, 서둘러 집에 있는 민춘란을 뒷산으로 되돌려 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