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인가? 이런 논쟁은 정말 무용하기까지 해 보인다. 물론 있다는 것은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무엇으로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또 없다는 것은 있다라는 토대에서만 사유하는 것이니 '없는 것이 있다'라는 것으로 수렴한다. 그런데 없는 것 자체를 과연 사유할 수 있을까? 사실 관념의 착각 외에는, 구성해 낼 수 없는 것은 생각하기 불가능할 것이다. 어느 날 발견된 동굴에서 처음 보는 생물 종이 발견되었을 때라도 그것은 없는 것 자체를 발견한 게 아니라 몰랐던 것을 알았을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 그러니까 없는 것도 있게 되는 건 아니다. '있다 없다'는 객관적인 걸 주관적 인식으로 꾸려나가다 보니 발생하는 몬제일 것이다. 그것은 존재자의 문제가 아니라 '안다와 모른다'의 차이가 아닐까? 단지 모르던 것의 출현. 이런 것에서 보면, 인식의 한계라기보다는 지각의 한계에 가깝다.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면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범위를 벗어난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드러날 뿐이다. 그렇다면 또 없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세상 현상은 그냥 주어진 게 아닐 것이다. 직접의 경험 외에도, 이 빈 공간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무언가를 꾸겨 넣는다. 관념이든 몰질이든... 무엇이 있다기보다는 무엇이 없는 것을 없애는 쪽일 것이다. 하지만 없는 것이 있어야 그 속을 채울 수 있다. 그러니 없는 것은 있다. 적어도 언어유희로 보면, 그렇다. 깊은 밤, 홀로 걸어가는 길에서 갑자기 귀신같은 것이 불쑥 튀어나오는 걸 상상하는 것도 유령이 무서워서 보다는, 잘 보이지 않는 주변에서의 위험에 극도로 촉각을 내세우는 태도가 아닐까? 자칫하면 보지 못하는 무언가에 걸려 크게 다치거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고도의 위험에 대비하는 자세가 아닐까? 그런데 그런 상상이 결여된 어린아이도 홀로 남겨졌을 때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린다. 무슨 사유가 일어나 그런 것은 아닐 것이며 과히 본능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집단적 무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없는 것은 그냥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의 유래를 알 수 없을 뿐이다. 알 수 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관념에서 발생하는 것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신인들, 외계 생명체든... 그런데 그것은 관념적이든 물질적이든, 실질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허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이다. 신이야 있든 없든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단지 한계에 부딪힌 인간이 그 너머의 존재를 생각하고 손을 뻗어 요청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있든 없든 자기에게 조력하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기계를 지나 AI 같은 게 세상에 출현하는 것을 보면, 점점 없는 것을 있게 만든다고 하기보다는, 없는 것을 더 없게 만든다. 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쪼그라들기보다는 더욱 알 수 없는 지역으로 빠뜨려 버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