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 글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읽는 사람 중심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를 수월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쉬운 문체, 간결한 표현, 이해를 돕는 친밀한 사례.. 읽는 사람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취향 여부와도 무관하게 읽히지 않는 글은 외면한다. 읽히지 않는 글은 쓰는 이의 불친절이 가득하다.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 많은 것을 담으려다 보니 글이 매우 추상적이다. 현학적인 표현도 난무한다. 그런데 그것을 읽는 사람 중심으로 하다 보면 장황해진다. 하고자 하는 말을 단 한 줄로 표현해도 충분한 데, 읽는 사람 중심으로 친절(?)을 베풀다 보면 길게 늘어진다. 철학이나 시 같은 경우에는 짧게 쓰지만 소설 같은 걸로 들어가면 열 줄 백 줄이 된다. 하물며 몇 백 페이지 분량의 철학책을 읽는다는 건 절망이다. 미학의 세계가 관람자와 예술가의 취향으로 분리된다고 하는 데, 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현상은 불가피한 것 같다. 그래서 오기가 발동한 글쓴이 경우에는 '에라 읽든 알든'하는 막무가내가 작동한다. 그럼 남이 읽든 말든 하는 글은 무엇 때문에 쓴다는 말인가? 비망록처럼 홀로 간직할 목적이 아니면 어이없는 입장이다. 그런데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견디기 힘든 노릇이다. 클래식 음악이나 예술작품, 난해한 사상 서적 같은 건 대중성이 없다. 그런데도 사후 평가는 대단하다. 돈이 안 되는 건 대중적 인기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시간이 그것을 키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이 더 큰 가치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평가 요소가 다르다. 예술가의 심오한 사상이 뒤늦게 발굴되거나 인정받는 것이다. 그는 가히 당대를 초월한 미적 감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대중의 시각에서는 동시 화할 수준이 못된 것이다. 대중성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얕은 이해만 있는 셈이다. 그럼 읽히지 않는 글도 이와 유사한 것일까? 오로지 글 쓴 사람만이 독자가 되는 글은 동 시대성을 벗어나 있다. 예언자처럼 같은 시대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가까이 다가서려 하지만 배척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의 취향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 남는다. 그렇기보다는 시간 속에서 숙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