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실 바깥은 금연구역입니다.'
불과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법과 합법의 경계가 나뉜다. 그렇다면 흡연구역은 합법인가?
흡연을 도덕적으로는 몰라도, 이슬람 세계처럼 아직 법으로 전면 금지하지는 않고 있다. 그래서 흡연권과 혐연권의 타협선 아래서 양 구역은 분리되어 공존한다. 국가 재정 수입을 위해 담배 생산을 법적으로 승인한다는 자체가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일이기는 하다. 국민 건강을 책임져야 할 정부에서, 건강 증진 기금 확보 차원에서 그것을 허용하고 있다니, 참 모순적이다. 암튼 이 아이러니하에서 양 구역은 분할된다. 논리 모순이야 수두룩하다. 흡연권이라는, 권리는 아니더라도 신체의 자유 등에서 파생하는 권한을 행사함을 정당시 하는 것만 봐도, 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암튼 양자는 패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권리 아닌 권리를 확보한다. 이는 아주 가느다란 선 하나만 넘어서면 불법과 합법이 쪼개지는 가벼움일까?
그렇다고 흡연권이 이를 부정할 건강 보호와 미분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에서 한 점을 엄청나게 확대하면, 그것도 매우 가까이 붙어 있는 두 점을 연결한 듯이 불법을 미분하면 합법, 합법을 미분하면 불법이 되는가?
그렇게 알고 있는 합법은 실은 불법이었고, 저렇게 인식하고 있는 불법은 합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이분법을 갈아엎고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또 아무 곳이나 포함되는 비식별 영역이 있다.
이 포함되면서 배제되는, 배제되면서도 포함되는 애매한 영역은 호모 사케르에서도 언급하는 바이다. 오늘날 우리 삶은 이런 모습을 숱하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곳저곳을 음험하게 들락거릴 수 있다면 놀라운 특권이나 행사하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부정성, 그러니까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자리가 없는 경우이다. 그것은 아예 법적 구획 자체마저도 무너뜨리는, 분류되지 않는 존재이다.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를 걷어찬다고 누가 크게 나무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물처럼 취급되는 이 생명들은 갈 곳이 없다. 기하학적 선이야 아주 가늘게 그어 놓은 곳을 넘어서더라도 별 저항은 없겠지만, 사회적 분리선은 너와 나를, 심지어는 미분류 대상을 극명하게 가른다.
이 관념의 세계는 현실계를 엄청난 힘으로 재단한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발바닥에 밟히는 대상은 그 힘으로 모조리 삭제할 수도 있다. 심지어 사태를 얼마든지 간단히 뒤집을 수도 있다. 구획선의 이쪽이 오늘은 합법이었다가 내일이면 불법으로, 그 반대나 또는 전면 폐지, 허용도 마음대로 인 것이다. 오늘 멀쩡히 출근했다가, 출입구 정면에서 느닷없이 사원증 인식 불능의 출입 금지 경보음에 접한다. 험한 꼴을 당한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바람에, 증거 불충분으로 가해자는 무죄 방면되고, 피해자는 거꾸로 무고의 누명을 쓰게 된다. 오늘의 선한 기부자는 내일의 주제 모르고 자선을 베푼 파산자가 되는 것이다. 수학적으로는 모든 집합의 공통 원소는 공집합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든 끼어 있지만, 무엇인 지 알 길 없는 공백이다. 우리가 지정한다고 A가 되고, 그냥 둔다고 B로 남는 건 아니다. 이런 공집합이 우리 사는 세상에 항상 존재하니, 그것을 건드릴 때마다 숱한 억측만 있을 뿐, 포함되면서도 배제되는 야릇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