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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하는 존재

by justit

변명은 잘못이나 충돌하는 의견에 대해 이를 교정하고 일치점을 찾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보충적인 설명이 부가되기야 하면, 의도나 의사를 명확히 하는 과정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자기 의사를 굽히지 않고 옹호하는 좀스러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세상 일이 어디 한 번에 삐끌어짐 없이 성사되는 경우가 있는가?
상대적 지위, 상황, 누군가에 반대하기 꺼려하는 개인적 성향 등에 따라 충분히 만족스러운 견해를 표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변명은 그런 불투명한 사태에 뒤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늘 후회하는 마음을 동반하며 나타난다.
이런 태도를 갱신하는 것이 변명이다 보니, 고개를 들고 자신 있게 내뱉은 말도 땅바닥으로 스멀 내려앉는다.
잘못도, 불충분함도 모두 변명으로 돌려지다가는, 사과로 주저앉는 것이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잘못을 인정하겠습니다."
차라리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보이는 태도는 변명을 밀쳐내는 것이다.
그러니 변명은 늘 따라오다가도 한꺼번에 걷어 차일 운명인 것이다.
옳든 그르든, 자기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변명은 한순간 힘을 잃고 부자연스러운 일로 바뀐다.
자연에는 변명이 없구나!
태풍과 해일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더라도, 자연은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강도를 줄일 수 있었음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도하는 손끝에서도 다음의 자비는 모아지지 않는다.
이 무정의 사태에 구구한 해명을 늘어놓는 것이 사람 세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자연은 억울한 꼴을 당한다. 그저 그대로 흘러가고 무너져 내리고, 또 불태웠는 데, 땅에서는 갖은 핑계를 들이대면서도 궁극으로는 하늘을 원망한다.

말은 자연의 소리를 모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달리 들린다.
"야옹, 그러렁"
"meow, purr "
한국에 사는 고양이는 '야옹', 미국 고양이는 '미아우'하면서 우는 것일까?
같은 고양이도 국적에 따라 달리 소리를 내는 것일까?
정말 고양이가 그렇게 우는지는 나라에 따라 달라지는 건 아니다. 이 듣는 차이를 고양이에게 묻고자 하면, 그는 자리를 옮겨버린다.
우리가 말을 통해 자연을 흉내 낸다고 하지만, 그것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태초에 자연이 간직했던 시원의 말과 소리를 어디서 알 수 있단 말인가?
변명받는 존재는 바로 이런 모습을 닮지 않았을까?
처음의 소리를 복원해 그것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이 몸짓!
그런데 우리는 점점 자연에서 멀어지기만 하면서도 때만 되면 이를 소환한다. 본래 하려고 한 말이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사물들은 제각각의 언어를 갖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참 거리를 두고 있는 인간은 그 언어를 해독하지 못한다. 설혹 가능하더라도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려 한다. 물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건 맞지만 산업생산에 불가피함을 역설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변명을 하고 있지만, 자연과의 신호가 끊겨 소통은 여전히 어렵다. 자연의 많은 양보와 설득하는 몸짓에도 불구하고 그 하소연에는 귀를 닫는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변명이 필요하다. 산허리를 베어내어 집채를 집어삼키는 산사태는 아무런 말이 없다. 평생을 착하게 살면서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쳐보지 않은 촌로를 덮친 물줄기도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예고된 인재', '마구잡이로 개발한 대가' 등 온갖 원인을 갖다 붙인다. 자연의 항의에는 여태껏 귀를 기울이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조그만 변명이 필요한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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