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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담킴 Aug 04. 2017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시의 리듬으로.

어렸을 적 내 꿈은 시인이었다. 키 낮은 책꽂이에 꽂혀있던 서너 권의 동시집을 닳도록 소리 내 읽으면서 그 안의 맑고 보드라운 단어들을 입 안에서 사탕처럼 녹여먹곤 했는데, 그것들이 그대로 스며들일곱 살 여자아이의 꿈이 되었던 모양이다. 여느 동화책이나 위인전처럼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 같은 것도 없었고, 갑자기 튀어나와 나를 당황시키는 어려운 단어도 없었다. 어린 내게 시는 쉬웠고 투명했으며 달콤했다.


그맘때쯤, '커서 뭐가 될 거니' 하고 물어오는 어른들이 생겼다. 나는 '시인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선 그  나이 때 여자아이 특유의 기민한 눈치로 반응을 살폈다.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되겠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에 비해 신통치 않은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시인이 되는 일은 쉽고 편안하고 달콤하지만은 않겠구나. 무릇 시라는 건 아름답지만 쓸모없구나.


일곱살 때 썼던 시. 딸의 글솜씨가 대견했던 엄마는 거금을 들여 코팅까지 해두셨다.


어쨌든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므로 다시 골몰하여 남들에게 꿈이라고 말할 만한 것을 궁리했고, 겨우 다시 찾아낸 것은 광고의 카피를 쓰는 '카피라이터'였다. 시보다 덜 아름답지만 더 쓸모 있는 글. 나는 그것을 쓰는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 '커서 뭐가 될 거니'라는 질문에 '카피라이터요!'라고 대답하자, 자신이 낸 문제에 정답을 들은 듯 어른들의 표정은 그제야 환해졌다. 그 얼굴들 사이에서 나 역시 숨죽여 안도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의 십 대와 이십 대는 단 하나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한 노오력(!)으로 완전히 잠식되었다. 두 번의 원형탈모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굴지의 광고회사에 신입사원이자 카피라이터로 소속된 자부심도, 내가 쓴 카피가 소위 '팔렸을 때'의 뿌듯함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이 네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섣불리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들은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비할 데 없이 쓸모 있었지만, 결코 아름답진 않았다. 그것들은 어려웠고 깜깜했으며 소리 내 읽으면 읽을수록 입 안에서 쓴 맛이 났다.


내가 쓰고 싶은 글과 써야 하는 글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슬슬 권태로워질 때쯤 아기가 태어났다. 일을 쉬게 되면서 자연스레 많은 시간이 허락되었는데 그 시간에 아름답고 쓸모없는 글들을 실컷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기가 잠든 틈을 쪼개어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글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더러는 공유를 하기도 하고 더러는 혼자 간직하기도 하며 내 속의 문장들을 써 내려갔다. 시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시의 마음으로 쓴 글들이었다. 그것들을 쓰는 동안만큼은 마음이 맑고 보드라워졌으니까.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10개월의 휴직 기간 동안 아기를 낳고 키우며, 밤잠을 줄이고 글을 고쳐 쓰며, 엉클어진 마음의 결을 다잡으며, 나는 소망했다. 비록 꿈꾸던 시인은 되지 못했지 영원히 시를 닮은 글을 쓸 수 있길. 더불어 영원히 시의 호흡으로 살아갈 수 있길. 거기에 조금 더 욕심을 부려서, 아무도 걷지 않은 새벽 눈밭 같은 이 아이의 인생 역시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여정이 되길. 그리고 그 여정을 한 발짝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 줄 수 있는 내가 되길.


언젠가 서점에 들렀다가 겉표지의 제목만 보고 무작정 집어온 시집. 김민정 시인의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시간은 잘도 흘러 어느덧 복직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다시 치열한 일터로 돌아가 밥벌이를 위한 글을 꾸역꾸역 써내야만 한다. 기껏 쥐어짜서 쓴 글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회의 테이블 위에서 생선처럼 발라지기도 할 것이고, 도무지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글을 써야 할 때도 있을 것이며, 내가 옳다고 믿는 것과 정반대의 지점을 향하는 글을 써야 하는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금의 나는 마치 글자보다 여백이 훨씬 더 많은 시집의 한 페이지처럼 느긋하다. 이런 느긋함이라면, 일하면서 찾아 올 그 어떤 부조리와 불합리도 모조리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간 겪었던 노동의 고생스러움을 벌써 다 잊은걸까. 아님 내 삶이 벌써 시의 리듬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걸까.


어쨌거나,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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