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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담킴 Aug 14. 2017

세 개의 방

나의 젊음이 머물렀던 공간들.

집이 망했다. 스물 셋이 되던 해였다.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한 아파트, 중형 세단, 철 마다 떠나는 해외여행에 익숙했던 우리 가족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아파트와 자동차는 순식간에 남의 소유가 되었고, 여행은 커녕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졸업까지 4학기가 더 남아있었으므로 나는 반강제로 자취생이 되었다. 23년 만에 혼자서 살게 된 것이다.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첫 번째 방, 종암동 고시텔]

                
학교 근처 고시텔에 급히 내놓은 방이 하나 있었다. 고시생은 아니었지만 그들 못지않게 나 역시 다급했고 간절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를 마치고 취직에 성공해야 했다. 침대, 책상, 냉장고로 꽉 차 발 디딜 곳 없는 작은 방. 낮에도 해가 들지 않는 그 방에 홀로 남아서, 태어나 처음으로 ‘살아남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싱거운 맥주를 마시며 생각에 골몰할 때면, 그 손바닥만한 방이 망망대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 안에서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가족도 친구도 답을 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나는 새벽녘까지 그것들을 혼자서 꼭꼭 씹어 삼켰다. 방을 비우고 나올 때쯤 내 정수리께에는 오백원짜리 동전만한 탈모가 진행 중이었다.
                    
[두 번째 방, 보광동 2층방]
                    
마지막 학기에 기적처럼 취직이 되어 회사 근처로 이사를 했다. 회사는 이태원 번화가 한 가운데에 우뚝 서서 늦은 밤까지 반짝이는 곳이었다. 거기서 내려다보면 내가 사는 곳은 꼭 달동네처럼 보였다. 경사를 따라 낡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산을 이루는 비탈에 내 방이 있었다. 그렇게 매일, 가장 근사한 곳으로 출근하고 가장 초라한 곳으로 퇴근했다. 그 낙폭은 제법 커서, 내 마음은 자꾸만 가난해졌다. 오직 취직만이 나를 지옥에서 구원하리라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어엿한 회사원이 되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싱거운 싸구려 맥주를 사 마시며 불면에 시달렸다. 질문은 계속되었고, 밤마다 퍼 마신 맥주 덕에 내장지방, 장염, 위염과 친구가 되었다.
                    
[세 번째 방, 용문동 오피스텔]
                    
젊음이라는 만병통치약도 소용없을 만큼 심신이 시들해져 갈 무렵, 다시 방을 옮기게 되었다. 5분 거리에 시장이 있고 5분을 더 걸으면 나무가 울창한 공원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일부러 퇴근길에 장을 봐서 밥을 해 먹고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요가학원에 다녔다. 그 동안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삶의 화두도 바꾸었다. '살아남는’ 것 대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는’ 쪽으로. 그렇게 가던 길을 옆으로 조금 틀었을 뿐인데 몸과 마음이 조금씩 나아졌다. 숨통이 트이고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 즈음 만나게 된 남자친구와의 결혼으로 마침내 마지막 자취방을 떠나게 되었다. 스물 아홉이 되던 해였다.


호박이의 방. (신생아 버전의 방으로, 지금은 초토화)


그 치기 어리던 내가 어쩌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가끔은 어리둥절하다. 해도 잘 안드는 골방에 파묻혀서도 이유도 없이 늘 설렜고 뜨겁던 이십대가 가끔은 사무치게 그립지만,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 지독하게 외롭고 가난했던 시간들을 다시 통과해 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중에 호박이가 이십대가 되면 한때 살았던 동네들을 함께 산책하며 나의 이야길 들려주고 싶다. 그 곳에서 내가 어떤 노래를 들었고 어떤 사랑을 했고 어떤 꿈을 꾸었는지. 얼마나 바보같았고 얼마나 무모했는지.


때론 그렇게 온 몸으로 부딪혀야만 찾을 수 있는 삶의 길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고 얘기해 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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