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를 기억하며.
세월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작년 나는 단 열 달 만에 세상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했다. 임신을 한 것이다. 만나면 낄낄대며 농담 따먹기에 바빴던 남자친구와 큰 고민 없이 결혼을 해 버린 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말이 부부였지 정신머리는 아직 연애 3년차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에게 의사 선생님의 ’임신 선고’는 충격 그 자체였다. 배는 아직도 이렇게 홀쭉한데, 그 존재가 믿기지 않아 손바닥만한 초음파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내 몸 속에 뭔가가 있긴 있다는데, 도저히 실감도 적응도 되지 않는 나날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나는 입덧도, 강렬하게 끌리는 음식도 없었다. 배불리 잘 먹은 날 정도로만 볼록해진 배 외에는 임신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몸 상태 때문에 난 종종 아가를 잊었다. 잘 풀리지 않는 회의 끝에 커피를 물처럼 들이켜고, 퇴근 후엔 태교는 커녕 TV와 스마트폰 화면에 몰두했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는 학설의 살아있는 샘플이라도 된 양 나는 내내 무심했고 무지했다.
내가 까맣게 모르고 지낸 사이에 아기는 부지런히 몸을 키워갔다.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배의 크기는 아기의 성장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남편의 소매 끝을 꼭 붙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영화 ’곡성’을 본 어느 날 밤부터는 쿵쿵, 인기척도 보내기 시작했다. ’나 여기에 살아있다’는 아기의 신호들이 점차 온 몸으로 느껴졌다. 차마 그것들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던 나는 일과 중 몰래 숨어 낮잠을 자기도 하고 편의점으로 달려가 달콤한 군것질을 잔뜩 사 먹기도 했다. 그 즈음부터 조금씩 실감했던 것 같다. 나에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그 중에서도 가장 엄청난 변화는, 초음파 화면으로밖에 보지 못한 이 조그만 아기가 내 세상의 완전한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변변치 않은 나에게 온 힘을 다해 삶의 전부를 걸고 있는 이 연약한 생명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싫어하던 당근을 꼭꼭 씹어 먹고, 헛구역질을 유발하는 엄지손톱만한 알약을 매일 세 개씩 삼켰다. 용기내서 ’먼저 퇴근합니다!’를 외치고, 출퇴근 버스에서는 뻔뻔하게 자리 좀 양보해달라고 말했다. 평소였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일들을 해 냈다. 나는 ‘엄마’니까.
이렁저렁 열 달이 지나 23시간 진통 끝에 아기를 낳았다. 아기를 품에 안고 든 첫 감정은 뜻밖에도 미안함이었다. 좀 더 좋은 것만 보고 들을걸. 몸에 좋은 것만 먹을걸. 무심하고 무지했던 장면들만 떠올라 사무치게 미안했다. 그 후 아기를 키우는 날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 많이 안아주지 못하고 웃어주지 못해 ’미안해’를 입에 달고 사는 엄마가 된 반면, 아기는 그런 나의 죄책감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고작 열 달에 삼백일을 보탠 시간이건만.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정직하게 쌓여 점 하나를 사람으로, 사람 하나를 엄마로 만들었다. 세월이 사람을 길렀다.
3년 전. ’세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던 배가 있었다. 그 배에 천금 같은 아들딸을 태워 떠나보내야 했던 부모들의 심정이, 엄마가 되고나니 한 뼘 정도 겨우 들여다보인다. 몸 속에 품어 키운 열 달부터 살 부비며 키운 십 수 년까지, 1분 1초 특별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을 것이다. ’나 여기에 살아있다’며 보내오는 아들딸의 또렷한 신호를 보고 들으면서도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던 미안함은 물론이요, 더 좋은 옷을 사주지 못했고 더 많은 용돈을 쥐어주지 못했던 미안함은 또 오죽하랴. 세상의 중심이 어느 날 갑자기 오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상실감의 수심은 어느 누구도 감히 헤아려볼 수 없는 것일 터. 그 배가 남긴 숙제는 너무나 무거워서, 건져 올릴 수도 없는 곳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아 버리는 듯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강산을 바꾸듯, 지난 3년은 이 땅에 사는 많은 이들을 바꾸었다. 3년 동안 사람들은 쉬지 않고 슬퍼했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공감하려 노력했으며, 끝없이 질문했고, 기억하려 애썼다. 그렇게 세월은 우리를 길렀다. 타인에게 무심하고 무지했던 일개의 ‘나’에서 투사로, 운동가로, 광장의 촛불로, 아이들의 어미와 아비로.
그리하여 마침내 배는 바다 위로 떠올랐다. 흙을 뒤집어쓴 배를 마주하자 불쑥 미안함부터 앞섰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배를 끌어올린 원동력은 3년 동안 쌓아올린 우리 모두의 미안함이었음을. 우리에게 남은 건 그 무거운 숙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난한 시간을 또 다시 견디며 풀어내는 일이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껏 그래왔듯 눈앞의 시간을 차곡차곡 정직하게 마주한다면 언젠가 숙제의 끝도 드러나리라고, 그 때쯤이면 아이에게도 ’세월’이라고 불렸던 배에 대한 이야기를 투명하게 전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