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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담킴 Jun 29. 2017

나의 자연주의출산기

아파 죽겠는 와중에도 타임라인을 적어보았다.

몰랐다. 내가 10개월동안 다닌 이 병원이 자연주의 출산을 표방하는 곳인줄은. 예정일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어느 날, 무심코 병원 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그 전에도 주구장창 붙어있었는데 도대체 왜 못봤던건지. 남편은 그 포스터가 떡-하니 붙어있는데도 내가 이 병원에 계속 다니길래, 내가 자연주의 출산을 원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포스터에 적힌 단어들을 곱씹어보았다. 자연주의 출산.. 인권분만.. 좋아보이는 말이긴 한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검색해보니, 자연주의 출산은 '의료적 조치가 없는 출산, 즉 촉진제, 경막외 마취, 회음절개, 태아감시 장치는 물론 관장과 제모를 하지 않은 상태로의 출산'을, 인권 분만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출산을 통해 태아가 탄생하는 순간에 겪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산모를 ‘환자’로 보는 의사 중심의 출산문화에서 산모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당당히 주장하고 태아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한다. 응, 그럼 좋은거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몰랐다. 나의 무심함이 훗날 무통없는 23시간의 내리진통을 선사할 줄은.


10월 9일 일요일 새벽 2시 경.

소변을 보러 들어간 화장실에서, 알수없는 액체가 주르륵. 직감적으로 알았다. 양수가 터졌구나. 양수가 터지면 감염의 위험이 있으므로 24시간 안에 아기를 낳아야 한다. 나는 자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가만히 말했다. "아기 나올 것 같아." 남편은 침대에서 펄쩍 뛰어올라 어쩔 줄 몰라하는데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병원에 전화해보니, 날 밝으면 아침 든든히 먹고 천~천히 나와보란다. 남편은 곧 다시 잠에 들었고, 나는 온갖 출산 후기를 찾아 읽어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10월 9일 일요일 아침 9시 경.

미리 꼼꼼하게 싸둔 캐리어를 싣고 출산 전 마지막 만찬을 먹기로 한다. (일요일 아침이라 고기집이 문을 열지 않은 것이 한스러웠다.) 신중하게 메뉴를 고르던 중, 어쩐지 든든하게 먹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우리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콩나물국밥집을 찾았다. 맛집답게 아침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콩나물국밥을 먹겠다는 일념하나로 조금씩 강해지는 진통을 느끼면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우리 차례가 되어 자리에 앉고 국밥 두 그릇이 나올동안 진통은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아플 때는 잠깐 쉬다가 안 아플때는 흡입하기를 반복하며, 출산을 앞두고 어떤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마음가짐으로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빈 그릇 두 개를 남기고 우리는 비장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10월 9일 일요일 아침 9시 30분 경.

병원에 도착하고, 드디어 말로만 듣던 첫 번째 내진. 간호사님의 박력 넘치는 손가락 놀림에 순간 움찔했으나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이어지는 태동검사. 아기가 나오려면 한~참 멀었단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견딜만하다. 병실에는 나와 남편 뿐이었다. 우리는 순산을 돕기 위해 비치된 모든 기구들을 한번씩 다 타 보고,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어서 듣고, 서로 심경인터뷰 동영상을 찍어주는 등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10월 9일 일요일 오후 5시 경.

진통은 조금씩 더해만 가는데 아직 이렇다할 진행은 없어 힘들어지기 시작할 무렵, 친정부모님이 허겁지겁 병원에 도착했다. 팅팅 부은 나를 보며 짠해하는 부모님 얼굴에 눈물이 핑 돌뻔 하다가도 진통이 찾아오면 눈물 대신 욕이 튀어나온다. 아빠가 종일 굶은 남편을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그 뒷모습이 어쩐지 서운했다.


10월 9일 일요일 밤 8시 경.

진통이 제법 세다. 코끼리 한 마리가 배 위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것 같다. 아플 때마다 소리를 꽥꽥 질러보지만 별 도움은 안된다. 무통주사 놔달라고 지나가는 간호사님께 애원해보지만 이 병원엔 무통주사가 없단다. 진행도 더디다. 배도 고프고 슬슬 지쳐간다.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간호사님께서는 수중분만용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주셨다. 들어가 앉아있으니 진통이 조금은 가시는 듯도 하다. 정신을 차린 나는 언제 아팠냐는듯 간호사님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물이 식고 밖으로 나오니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이 고통의 끝이 있긴 있는 것인가.


10월 9일 일요일 밤 10시 경.

오늘 안에 나올 기미가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 오늘 밤은 입원실에 가서 일단 자고, 밤 중에 진통이 시작되지 않으면 아침에 유도분만을 해보자고. 1년보다 더 길었던 오늘 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치며 억울함에 눈물이 다 나온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입원실로 돌아가 잠을 청해보지만 쉽사리 오지 않는다. 남편은 머리를 대자마자 코를 곤다.


10월 10일 아침 8시 경.

잠깐 잠들었다가, 아파서 깼다가, 하면서 긴긴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진행이 여전히 더뎌서, 유도분만을 하기로 한다. 유도분만 마저 실패하면 제왕절개를 해야한다. 하루를 쌩으로 아프고 결국 제왕절개를 하고 마는 가장 안타까운 케이스가 될 위험에 처했다. 어떻게든 자연분만을 하고 싶어, 간호사님께 진지하게 방법을 여쭈었다. 유도분만제를 맞고, 나는 간호사님이 하라는대로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앞이빨이 쏙 빠지도록, 최선을 다해 힘을 주었다.


10월 10일 아침 10시 경.

갑자기 진행이 빨라졌단다! 이대로라면 자연분만이 가능하겠다며, 조금만 더 진행되면 바로 분만실로 이동하자는 희망찬 말씀에 먹은 것도 없는데 힘이 난다. "12시 전에 낳고 다같이 점심 먹으러 갑시다!"라는 간호사님의 화이팅 넘치는 멘트가 나를 자극시켰다. 더 가열차게 힘을 줘본다. 호박이를 만날 시간이 가까워 옴을 느낀다.  


10월 10일 아침 11시 30분 경.

분만실로 이동했다. 분만실은 듣던대로 어두웠고 조용했다. 최소한의 간접조명만이 밝혀져 있었고, 잔잔한 클래식이 들려왔다. 옆에는 태어날 아기를 목욕시키기 위한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분만실 안에는 한 분의 의사선생님, 두 분의 간호사님, 남편,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명 뿐이었다. 아주 차분한 분위기의 분만실에서 출산이 시작되었다. 12시 전에 낳고 말겠다는 일념과 오기로 나는 온 몸에 초인적인 힘을 끌어모았다.

출산의 고통은, 한 마디로 '황당'했다. 어떻게 이렇게 아플수가. 그 어떤 묘사도 이 고통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출산이 이렇게 아픈 짓(?)임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존속되어왔다는 사실이 나를 황당하게 했다. 그렇지만 이제와서 멈출수는 없는 노릇. 모든 것을 얼른 끝내고 싶어 나는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10월 10일 정오 경.

축 홍호박 탄생. 후반 처치를 할 동안 남편은 옆에서 호박이를 목욕시켰다. 깨끗하게 씻은 호박이를 내 가슴팍에 올려주고 모든 의료진은 분만실을 나갔다. 처음으로 맞는 세 식구만의 시간.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동시에 소리내어 웃었다.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힐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 황당한 고통은, 젖을 찾아 무는 작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호박이의 모습에 씻은 듯이 잊혀졌다. 황홀했고, 경이로웠다. 티끌 하나도 묻지 않은, 순도 100%의 기쁨이었다. 그렇게 장장 23시간의 진통 끝에 호박이는 내 품에 안기게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우락부락한 아빠손에 목욕당하는 호박이.
제가 낳은건 원숭이인가요?


만약 둘째를 갖게 되어 또 자연주의 출산을 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긴 진통이 조금 버겁기는 했어도, 아가와의 위대한 만남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었다. (참고로 나는 엄청난 엄살쟁이다.) 또한, 나의 고통과 기쁨을 가족의 일처럼 공감해주고 손잡아주던 병원의 따뜻한 공기가 참 좋았다. 무엇보다 출산 과정 내내 나와 아가가 함께 존중받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최소한의 의료적 행위를 통해 출산 자체가 자연스레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주셨던 모두의 모습이 9개월이 지난 지금도 아직 눈에 선하다. 살면서 한 번쯤 익스트림 고통에 도전해 보고 싶다면, 출산의 과정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아기와의 첫만남을 특별하게 준비하고 싶다면, 자연주의 출산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하지만, 둘째를 갖는 일은 당분간은 생기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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