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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담킴 Jul 01. 2017

'맘충'이란 단어에 대한 고찰.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큰 화제가 되었던 책,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중 애엄마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구절.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이거슨 하이퍼리얼리즘! 80년대생 대한민국 여자가 사는 아주 보통의 삶을 다룬, 실화보다 더 실화같은 소설 <82년생 김지영>


현재 대한민국에서 애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 한 단어로 간단히 압축될 수 있겠다. '맘충'.(공공장소에서 진상을 피우는 애엄마에 한정된 단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으나, 일상생활에서 그런 심연의 의미까지 고려하며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상을 피우는 애엄마에 한정된 단어라면, 차라리 '진상맘'이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엄마를 통칭하는 '맘'에 벌레 '충'이 붙은 이 짧고 굵은 단어는 애엄마에 대한 공공연한 혐오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이 징글징글한 호칭은 온오프라인에 널리 퍼지며 애엄마에 대한 반감을 견고히 하는데 한 몫 했다. 그렇게 애엄마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서열이 낮은(=벌레와 동급인) 계급이 되었고, 아기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벌레같은) 존재가 되었다.


반면 아빠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육아에 1g이라도 참여하는 남자들은 '슈퍼맨' 내지는 '라떼파파' 등 그럴싸한 이름으로 불린다. 그렇게라도 남자가 육아에 참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기저에 깔린 '맘혐'의 정서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엄마의 의무인 육아에, 굳이 참여할 필요가 없는데도 애써 함께 해주시므로 '슈퍼맨'이요, 라떼 마시면서 유모차 미는 애엄마는 된장녀에 맘충으로 불리나 똑같은 행위를 아빠가 하면 '라떼파파'라 불린다. (이런 맥락에서, '대디충', '파파충'이라는 단어는 만들어질래야 만들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부 중 여자만이 육아를 책임지도록 종용하는 이노무 사회적 구조는 두말하면 입아프다. 그 와중에 '맘충'이라는 단어는 육아에 일절 도움이 안되는 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교묘히 감추고, 화살을 여자 개개인에게 돌린다. 자연스레 제도적 개선을 위한 논의는 뒷전이 되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애엄마들을 욕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저 여자는 본인의 의무인 육아는 어따 내팽개치고 집 밖에 나와서 남편이 벌어다주는 월급으로 커피를 마시는거야? 저런 맘충같으니라고!'


나무위키에는 맘충에 대해 이렇게나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볼 일이 있어 아기와 함께 나갈 일이라도 생기면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며 몸을 사리게 된다. 행여나 맘충이 될까봐. 맘충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일은 무섭다기보단, 외롭고 서글프다. 맘충이라는 말은, 아기를 낳은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세상의 변두리로 자꾸만 밀쳐낸다. 나 역시 애엄마가 되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고독감으로 매일 몸서리친다. 집 안에서는 독박육아로. 집 밖에서는 벌레 취급으로. 새삼스레 애엄마로 사는 일은 이렇게 외로운 일이었구나 싶다.


고 3때 열심히 본방사수하던 드라마 '봄날'에서 고현정이 했던 대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말이 마음을 만들었다"고. 말의 힘은 그렇게 세다. 무심코 던진 말에 누군가에겐 혐오의 마음이 생기고, 누군가는 맞아죽는다. 이 세상이 갑자기 천지개벽할리는 없다. 그런 건 애시당초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맘충'이라는 호칭을 모두가 사용하기 꺼리는 분위기만 조성되더라도 애엄마를 외로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지금의 현실이 아주 조금은 좋은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말에 가리워진 문제의 본질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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