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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킵고잉 Nov 19. 2023

#3. 사고 후 6시간

이성 또는 생존본능이 버티게 해준 그 시간

잠든 지 1시간도 안되어서 눈이 떠졌다.

새벽 6시. 그는 출근하고 없고

나는 이 침대에서 일어나면 지독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출발선에 서서 걸어야 한다.


일단 내가 처음 한 일은 이혼전문변호사를 찾는 것이었다. 검색해 본 결과, 유명한 이혼전문변호사는 작은 사건들은 직접 하지 않고 밑에 직원들에게 시키기 때문에 별로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한테 잘 맞는 변호사를 찾으려면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발품을 팔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럴 힘이 없었다.

변호사 사무실이 많은 그곳에 가서 그냥 무작정 들어가 내 사정을 하나씩 말하며 돌아다닐 모습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그리고 발품을 팔며 잘 맞는 변호사를 찾을 때까지 걸리는 그 시간 동안 그를 평소처럼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의 플랜은 이혼전문변호사를 빨리 만나서 새벽에 찾은 증거로도 충분한지 확인하고 아니라면 포커페이스를 하고 증거를 더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빠르게 적절한 변호사를 찾는데 목표를 두었다.


성격차이 이혼이 아닌 귀책이 100%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싸움에서 나는 피해자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략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했다. 그러려고 한건 아니지만 생존본능 같은 게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여러 서치를 통해서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평이 좋은 변호사를 찾았다. 오후 1시로 상담예약을 잡고 남은 시간 동안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변호사 상담은 무료가 아니라 시간당 돈을 받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감정적으로 변호사를 붙들고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이 상황에 대한 요약,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의 각각 얼마씩 있었고 현재 상태의 재산에 어떠한 기여분들이 있는지, 그리고 소송을 가야 하는지 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내가 궁금한 것들에 대해 아이패드에 적기 시작했다.


그걸 적는데 정말 중요한 보고서를 쓰듯 집중했다. 몇 년 만에 이렇게 활기차게 머리가 돌아가고 집중이 되는 건지 참.. 울지도 않고 그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나 자신이 나도 살짝 무서울 정도였다.


그렇게 정리를 한걸 가지고 변호사를 찾아갔다. 사무실 안에 회의실에 앉아있는데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싶었다. 조금 뒤 들어온 변호사는 명함을 주며 어떤 일로 오셨냐는 물음에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 애쓰면서 말했다.


새벽에 남편이 성매매를 한 사실을 알게 되어서 왔다.


이혼전문변호사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성적인 직업이라 그런지 별로 놀라지 않고 리액션은 딱히 없었다.

나도 위로를 바라고 간 건 아니기에 일단 증거와 정리한 내용들을 보여줬다.


변호사는 내가 보여준 증거들과 정리해 온 내용을 보고 이 증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 더 이상 찾는 건 위험하다고 조언을 해줬다. 그리고 결혼생활 1년 반 중 1년간 회사를 쉬었기 때문에 조정이혼으로 갔을 때 재산분할은 불리할 거라 말해주었다.


위자료가 있지만 그 액수는 크지 않고 재산분할은 귀책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냥 유리한 금액으로 협의이혼을 하는 걸 권했다. 정말 현실이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법이 있지라는 건 뉴스를 보면서도 많이 느꼈지만 내 얘기가 되니 진짜 황당하고 억울했다.


변호사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고, 결혼생활도 짧고, 아이도 없으니 조정으로 가게 되면 시간과 돈만 드니 협의이혼을 하라고 조언을 하며 언제쯤 얘기하면 좋을지도 알려주고 나의 편에서 많은 조언들을 해주었다.


그러다 혹시 그 사람 폭력적인 성향이 있냐고 물어봤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딱히 그런 면을 보인적은 없다고 말하니 이 사실을 안다는 걸 그에게 얘기할 때 핸드폰은 꼭 손에 쥐고 있고,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심장이 덜컥하며 눈물이 쏟아졌다.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눈물이 났다. 정말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지만 내가 봤던 그 카톡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기에 내 예상밖의 행동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과 무서움과 정말 이렇게 끝까지도 갈 수도 있구나.라는 현실을 잠깐 상상을 하는데 끔찍해 눈물이 흘렀다.


다시 마음을 잡고 조언해 준 내용을 정리하고 나왔다.

회사를 쉬고 있어서 어쩌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과정을 회사 연차를 내면서 해야 했으면 시작도 못했을 것 같았다.


변호사 사무실 앞에 있는 로또명당가게에 눈에 들어왔다. 종교는 없지만 누군가가 있다면 이 정도의 충격을 줬으면 이 정도의 운은 줘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웃겼다. 그냥.

그리고 대단했다. 변호사 사무실을 알아보기는커녕 친구들과 엄마한테 전화해서 울고불고 털어놓으며 침대에 누워서 계속 울었을 것 같은데 변호사상담에 로또까지 사는 내 모습이.. 진짜 뭔가 연극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현실이 맞나 싶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그와 카톡 할 때는 평소 말투와 이모티콘을 써가면서 일단은 모른 척을 했다.


그가 나의 뒤통수를 쳤듯이 나도 모든 준비를 하고 그에게 터뜨릴 것이다. 역겹지만 아직은 모른 척하고 평소처럼 대화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사건 발생 후 6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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