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이 아닌, 무지개 빛으로 머물기.
나는 조용한 관종이었다.
조용과 관심받고 싶어 하는 사람을 뜻하는 관심종자가 어울리는 단어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남들에게 주목받고 싶지 않으면서도,
누군가 나를 알아봐 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향인과 외향인 그 어딘가에 자리한 나는,
기분 좋은 어느 날에는 나도 모르게 들뜬 마음으로 행동하고,
또 어떤 날에는 센치해진 마음으로 스스로를 고독함에 빠뜨리고는 했다.
20대의 끝자락에 선 지금에서야,
어린 시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나의 행동과 마음들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부모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과 관심이 부족했다.
부모로부터 배웠어야 할 교육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나와 우리 가족은 이 결핍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모난 사람이라고 느꼈다.
이를 남들에게 숨기고 싶어 했다. 결핍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공허함과 부족함을,
나는 친구들에게서 채우려고 했다.
누군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하며 스스로도 채워지고자 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전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시간들이라 믿고 살아왔다.
온전히 마음을 채우지 못하다는 것을 모른 채.
길지 않았던 인생에서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제법 만들어갔다.
아니,
나는 좋은 인연을 만들었어야만 했다.
살아갈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어린 시절의 나는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다는 것에
집착하고, 그것에 살아있음을 느낀 사람이었다.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지가 내 인생의 전부였던 시기가 있었다.
누군가로 인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해 보면,
누군가로 인해 죽음의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주변인들에게 받은 기쁨으로 웃고,
그들에게 받은 상처로 아파하는 삶을 반복해 왔다.
도쿄에 가기 얼마 전,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사람과 큰 다툼과 갈등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나 스스로 관계를 정리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수없이 인연을 맺고 끊음을 반복하며 나름 관계를 형성하는 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오랫동안 내 곁을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잘못된 맹신을 갖고 있었다.
가족처럼 의지하던 사람에게 받는 상처와 배신감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던 나를 손쉽게 무너뜨렸다.
조금은 스스로가 단단해졌다고 믿어 왔던 나는,
그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껍질만 두터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나는 온전히 아파했다.
도쿄에서 지낸 지 6개월 차 정도가 되니 여유를 가졌다.
들리지 않던 언어도 들리고, 일도 어렵지 않다.
휴일이면 가보고 싶은 식당을 가보고 쇼핑도 마음껏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과 나의 속도에 맞춰 생활을 느낄 수 있다.
공원에서 산책하며 독서를 하는 시간이 늘어간다.
평생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생각과 근심들이,
이제야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닌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느꼈다.
공원에서 느끼는 평온함에는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과의 연락에서 비롯된 평화이기도 하다.
내가 여전히 의지하고, 나의 인생에 많이 관여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들에게서 어느 순간 하나같이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평온해 보인다’
나는 평생을 좋은 모습으로, 온전한 평온함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발버둥 쳤다.
노력하고 고민하던 시기의 나는 오히려 불안정한 사람에 가까웠는데,
이방인이 된 현시점에서 찾은 평화의 모습이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이 전하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평화를 찾게 되었다.
도쿄에서 느끼는 감정은 공허함, 쓸쓸함과 같은 차디찬 단어가 아닌.
‘평온함’ 딱 이 따스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다.
살면서 처음 느끼는 견고한 마음의 평화.
그 속에서 지내는 시간들.
그렇게 건강하게 다시 채워지는 나의 생각.
이런 생활들이 반복되다 보니,
마음속 깊이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
주변인들에 대한 감사.
지금의 나를 채워준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내가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고민.
때는 도쿄에서의 늦여름.
여름과 가을이 만나는 지점의 어느 날.
당시에 느끼던 행복을 언젠가는 잃게 되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마음이 삼켜진 퇴근길이었다.
나의 일상은 평범하게 잘 지내다가도, 어느 한순간 스위치가 켜지는 것처럼,
나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는 한다. 이런 나 자신이 난 지독하게 싫고, 온 마음으로 안쓰러웠다.
이런 나는 잿빛과도 같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마음을 떨쳐내고자 아끼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내 목소리만 듣고도 맞춤형 질문을 건네는 고마운 친구다.
그렇게 나는 매번 이 친구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어리광을 부리듯.
내 입에서 ‘잿빛’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녀는 나의 말을 반박한다.
“넌 무지개 같은 아이야”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깊은 고민을 하며, 남들에게 행복을 주는 무지개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녀는 나를.
이 말은 한순간 벼랑 위의 나를 안전한 초원으로 불러들인다.
실제로 나는 잿빛의 사람이 아닌 무지개 색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던걸까.
제 스스로가 잿빛인 주제에, 무지개를 탐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통해
내가 적어도 무지개가 되고 싶은 잿빛으로 보이기는 한다는 안도감을 가진다.
친구의 말 한마디가 마음의 스위치를 내린다.
제법 쌀쌀해진 새벽 공기를 뒤로한 채 친구와의 통화를 끝내고,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하는 한 가지.
나를 사랑해 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깊은 고민.
사실 평생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살게 해주는 이들을, 내가 살기 위해 내 곁에 머물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지금에야 깨달은 어렵지만 간단한 방법.
‘그저 잘 지내기’
‘결핍과 두려움에 숨어 몸을 부풀리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단단해지기‘
‘그렇게 그들 곁에 단단하고 좋은 사람으로 떳떳하게 머물기‘
거창한 말 필요 없이,
그냥 우리 잘 지내자,
서로의 무지개 되어주자.
그렇게 받는이 없는 편지를 마음속으로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