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게 빛나는 사람들.
순수함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상태, 어떠한 의도나 계산 없이 진실된 마음을 유지하는 태도.
신주쿠 한식당에서 일 한지 3개월 정도가 되었을 무렵.
책임감 없는 사장님 때문에 점점 정신적 피로도가 쌓여만 갔다.
세 명이서 일하던 매장은 한 명의 직원이 그만두면서 두 명이 되었고,
그 빈자리를 채워줘야 할 사장님은 나 몰라라 하는 상황, 그에 대한 피로도는 온전히 내가 짊어질 몫이었다.
이런 것들에 치이고 지쳐서, 일본으로 도망쳐 왔었다.
올곧지 못한 사람들과 본인이 해야만 일을 하지 않는 이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상당한 피로를 느끼며 살아왔다.
나는 도쿄까지 와서도 결국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일하는 것처럼 책임감을 갖고 노예스러운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일의 편함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싶었다.
적어도 일 때문에 나의 도쿄생활이 먹구름 끼게 해서는 안 됐다.
그렇게 풀타임으로 일하던 한식당에서 한 발을 빼게 되었다. 점심을 그만두고 저녁만 출근하겠다고 통보했다.
부족한 나의 생활비는 집 근처 소바집에서 일하며 채우기로 했다.
이 소바집은 내가 도쿄에 처음 온날, 동네에서 먹었던 그 소바집이다.
그때 처음 뵌 한국인 사장님과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소바집에서의 또 다른 출발은 꽤나 기분을 환기시켜줬다.
나의 새로운 시작이 시작될 때, 누군가의 시작도 함께하게 되었다.
이 시기쯤 한식당에도 새로운 한국인 바이토 친구가 새로 들어오게 된다.
나보다 5살이나 어린 이 친구는 현재 어학원을 다니고 있는 유학생 신분이었다.
굉장히 밝고 때로는 어리숙하며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친구였다.
예의도 바르고, 남자 녀석이 애교까지 많다. 덕분에 나와, 함께 일하는 이모님까지 금방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또 다른 나의 바이토, 소바집에도 홀을 봐주는 일본인 대학생이 한 명 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이 여학생은 20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눈이 크고 굉장히 귀여운 동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외모를 가지고 있고, 상냥하고, 역시나 밝은 아이다.
한식당 일이 익숙해지고, 또 도쿄가 나름 익숙해질 시기인 5개월 차.
흔히들 말하는 워홀러들의 현타 법칙인 3,6,9에서 벗어나지만 나는 5개월 차에 큰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 예로부터 워홀들 사이에서는 3개월 6개월 9개월마다 현타가 온다는 말이 있다.)
초창기에 적응하지 못했을 시절과는 다른 감정의 허무함이다. 당시에는 두려움에서 오는 절망감이었다면,
이번에는 꿈만 같았던 일상이, 나의 일상과 다를 게 없는 지독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의 허무함이었다.
그 배경에는 한식당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영향이 컸다.
일의 강도는 높아져만 가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라는 환경 때문에 도쿄에 있음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인간의 영악함을 눈앞에서 다시 보다 보니 스트레스가 점점 쌓여만 간다.
이런 시기에 어린 동생들을 만나게 됐다.
나는 순수함을 가진 사람들이 좋다.
순진함, 착함, 연약함, 바보 같은 이라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진정한 순수함을 가진 이들은 이와 같은 말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사람들이다.
나 역시 그런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고자 했다. 하지만 나의 순수함은 매번 상처받고 저버리는 꽃이 되었다. 이미 시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때 묻히고 숨어버린 그런 이런 나를 비춰주는 빛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 한없이 즐겁고 행복함을 느낀다.
현실은 살아남기에 어려운 곳이라 생각이 든다. 남을 믿기가 어려워졌고, 믿음을 떠나 경계해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나 역시 그런 사람들로 인해 예전만큼 기쁜 마음으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순수함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비추는 태양이 되어준다. 관계에서도 이 넓은 세상 속에서도,
그들의 감화력은 누군가의 작은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그만두기를 고민했던 한식당을 동생 덕분에 계속 다닐 수 있었다.
나의 수고를 함께 덜어주고, 도쿄에서 늘 홀로 다니던 나와 밥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따뜻한 마음이 좋았다, 동생이 따라다녀준 덕분에 자칫 후회할 수 있었던 선택을 뒤바꾸게 된다.
잠깐이었던 마음속 폭풍우가 지나고 나니, 그곳에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단순하게 페이도 좋고, 교통비가 나오며, 식사도 마음껏 해 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나의 신주쿠 교엔과 가까운 곳이다.
단골손님들은 나를 좋아해 주신다. 나는 덕분에 일본어 공부를 어렵지 않게 해 나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곳에서 일할 수 있어서 운이 정말 좋았던 사람이다.
워홀이 끝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먹구름 낀 마음으로 뛰쳐나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도쿄생활이 한국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던 시기였다.
작은 것들을 사랑하던 내가, 당장의 큰 문제와 모난 마음들에 눈이 가려져 소소한 행복과 감사를 느끼지 못했다.
이 시기에 소바집에 만난 동생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언어적인 문제로 그녀와 완벽한 대화는 어려웠지만, 함께 일하는 날이면 매번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녀는 매번 내게 상냥한 사람이다.
나는 분명 이 시기에 비관적인 마음에 침식당하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서서히.
이 일본인 동생과 함께 일하고 퇴근하는 날이면, 그날만큼은 편안한 마음으로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던 것 같다.
동생은 나를 비관의 늪에서 꺼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도 모르게 서서히.
두 동생들 덕분에 어느덧 도쿄 생활이 안정기에 들어섰다.
복잡한 마음의 5개월 차는 어느덧 지나가고, 평온한 마음속에서 시간은 한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소소한 즐거움이 생기고, 생활에 만족감이 든다.
제주 동생과는 도쿄 이곳저곳을 함께하고,
소바집의 일본인 동생과는 함께 동네 축제를 즐기거나, 봉사활동을 가기도 한다.
나의 도쿄라이프가 두 사람 덕분에 빛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에게는 도쿄에서의 1년이라는 시간들이 마냥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분명 어둡고 절망적인 시기도 존재한다.
나는 이런 시기를 혼자만의 힘으로 잘 이겨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의 일상에 나타나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허무함 속에서 다른 1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어린 두 동생들에게 구원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찬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