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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마리브레 Jul 08. 2022

라면 먹고 갈래? (feat. 90년대 Ver.)

"눈치 없는 기 인간이가?"

몇 년 전이었나? 언제부터인가 TV프로그램에서 “오빠, 라면 먹고 갈래?”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퇴근 후 출출할 때면 신라면을 짭조름하게 끓여서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먹곤 했다. 라면 면발의 그 꼬들꼬들한 식감과 MSG가 주는 찐한 여운이, 김치냉장고 속에 오래 있어 시원해진 맥주와 만나면, 위벽을 타고 흘러가는 그 서늘함이 하루 동안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곤 했다. 재밌는 오락프로그램이라도 같이 보면 그 자체로 힐링이 되던 시간이었는데, 그날따라 여자 개그맨이 콧소리 넣어 하는 “오빠, 라면 먹고 갈래?”라는 그 한마디에 그만 빵 터져서 입에 넣고 있던 라면을 뿜었다. 무슨 쌍팔년도 아니고, 20세기도 아닌 21세기에 저런 클래식하고도 노골적인 작업멘트가 통한단 말인가? 오~웬걸?!! 이게 통하네?!! 그 후 드라마나 영화에도 심심찮게 “라면 먹고 갈래?”는 무슨 암호처럼 통용되곤 했다. 복고풍이 유행하고, 레트로가 대세라지만, 이건 올드해도 너~무 올드한데?!!


문득, 내 기억 속에 있는 아주 오래 전 한 장면이 집에 숨겨둔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은 듯 떠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후반. 20대의 나는 참 예뻤지. 후후~

당시 나는 4살 연상의 ‘오빠’랑 사귀고 있었는데, 그 오빠가 무역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종종 해외출장을 다녀오곤 했다. 젊은 시절이라 거의 매일 만나 데이트를 하다시피 했는데, 오빠의 중국 출장으로 일주일씩이나 강제로 헤어져 있어야 했다. 어찌나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오빠였는지, 출장을 다녀와서도 우리집 앞까지 나를 찾아와 만났다. 내 기억으론 일요일 점심 때쯤이었다. 일주일만에 만난 오빠는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면서 내 볼에 살짝 가벼운 뽀뽀를 해주곤, 배가 고프다고 빨리 뭐라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당시 나에게 데이트 비용을 거의 못 쓰게 하던 착한(?) 오빠였기에 이번만은 꼭 내가 사고 싶어서 “오빠, 뭐 먹고 싶어? 출장 갔다 오느라 힘들었는데,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뭐든 말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오빠, 뜬금없이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한없이 해맑던 나는 속으로 내심 내가 산다고 하니까 내 돈 아껴주려고 이러는가 싶어 그 배려심에 또 한번 감탄을 하고. 집 근처 분식집이 어디 있었나 기억을 더듬으며 라면 찾아 삼만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서울의 식당가들-특히 주택가에 있는-은 일요일엔 거의 대부분 문을 닫았다. 몇 군데 식당은 아예 문을 닫았고, 몇 군데 식당은 라면을 팔지 않았다. 내가 애걸복걸 하다시피 “돈 더 드릴 테니까 라면 좀 끓여주시면 안 돼요?”라고 불쌍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박이며 말해도 당췌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3~40분쯤 헤맸을까? 우리는 할 수 없이 동네 아구찜 집으로 들어갔다. 매콤한 게 먹고 싶어서 그랬는지, 그 가게말곤 대안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을 참 복스럽고 맛있게 잘 먹는 나는 감자사리를 추가로 주문해서 양념에 싹싹 비벼 먹고, 공깃밥까지 깨끗하게 긁어먹었을 테다.


그렇게 해맑게 밥을 먹고, 역시나 오빠가 계산하려는 걸 거의 싸우다시피 해서 내 카드로 계산을 하고 오빠 차에 올라탔을 때다. 뭔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 오빠의 한마디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비록 그 오빠 얼굴도, 목소리도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지영아, 난 그냥 니가 끓여주는 라면 한 그릇 먹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돌아다녀야 했지? 그냥 니 자취방에서 끓여주면 되는데...”

사실 그 오빠랑 헤어질 때까지 라면을 한 번도 끓여주지 못했다. 나는 요리를 잘하는 편이라 라면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도 잘 만드는 편이었는데... 자취를 하고 있어서 우리집에서 꽁냥꽁냥 데이트도 할 수 있었는데... 난 뭐가 두려워서 그 오빠를 우리집, 내 방에 못 들어오게 했을까? 그때 우리집에서 그 오빠랑 같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면 지금쯤 내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내 기억을 다시 되짚어보니,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가 처음 나온 건 2001년 이영애, 유지태 주연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였다. 그러고 보니...내가 만난 그 오빠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었구나.


오늘의 교훈 : 눈치 없는 기 인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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