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차갑게 식은 커피 잔을 앞에 두고 민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니터 화면은 꺼져 있었고, 책상 위엔 정리되지 않은 서류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는 이미 실직한 지 한 달이 넘었다. 15년 동안 몸담아온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뒤로, 하루하루가 무겁게 흘러갔다. 전문직 라이선스를 바탕으로 쌓아온 그의 경험과 노하우는 더 이상 시장에서 가치가 없었다. AI는 더 빠르고, 더 정확하며, 무엇보다도 더 쌌다.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에 민수는 고개를 돌렸다. 딸, 하윤이가 곰인형을 끌어안고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아빠, 왜 아직 안 자?"
민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냥... 일이 조금 남아서. 하윤이는 얼른 가서 더 자야지."
하윤이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작게 끄덕이며 돌아섰다. 작은 등 뒤로 곰인형의 한쪽 발이 바닥을 쓸었다. 민수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슬프게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내 수진은 이 모든 사실을 아직 모른다. 어젯밤에도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야근을 마치고 돌아왔다. 의류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녀 역시 요즘 AI 기반의 자동 디자인 소프트웨어와 경쟁 중이었다. "우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감각을 지녀야 해"라던 수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민수는 이제 그런 말들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는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무언가를 마셔야 할 만큼 목이 마르지도 않았다. 그저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손을 움직였던 것뿐이었다.
며칠 후, 그는 수진에게 결국 모든 걸 털어놓았다. 수진의 얼굴엔 당황과 걱정이 뒤섞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칼처럼 날카로웠다.
"우리 어떻게 하지?"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알아볼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배달이든, 경비든 알아볼게..." 민수의 목소리는 떨렸다. 스스로도 자신의 말에 확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지역 커뮤니티 앱에서 '단기 일자리' 목록을 보다가 한 건의 공고를 발견했다. 그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 쓰레기 분리수거 관리인 모집. 시급은 낮았지만 즉시 시작할 수 있었다. 민수는 곧바로 지원했다.
첫 출근 날, 그는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각종 페트병과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멍했다. 회사에서 쓰던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의 화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그래프와 수치들, 정교하게 설계된 보고서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랴. 민수의 옆을 지나치는 자율운전 쓰레기차는 민수의 새로운, 어쩌면 최후의 직업마저 위태롭게 할 모양이다.
하윤이가 어린이집에서 만든 '우리 가족' 그림을 들고 온 날이었다. 민수는 그녀의 손에 들린 그림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림 속의 아빠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손에는 가방이 들려 있었다. 하윤이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빠, 멋있지? 선생님도 멋있다고 했어!"
민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 속에선 불명확한 고통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식탁에 앉아 있었고, 수진은 조용히 옆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우리 같이 해낼 수 있어."
그 말이 왜 그토록 서글프게 들렸을까. 내일 새벽 자신을 깨울 커피의 쓴맛이 일찍 혀끝에 스며드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