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 배부른 고민에 체해 구역질이 난다. 생각을 과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시지프스의 바위를 굴리며 한평생을 살아간다. 죽음조차 '끝이구나' 하고 그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헤매었다. 그 어리석은 시간들이 내 입속으로 생각들을 쑤셔 넣었다. 나는 그렇게 구역질을 해대는 청년이 되었다.
시지프스의 삶은 형벌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가. 생명은 선물인가. 세상이 지옥인데, 삶이 형벌이 아니라고 어떻게 떠들 수가 있나.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어떻게든 이 지옥에 오래 남도록 사탕발린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을 깨닫고 나는 고민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비극이었다. 어느 날 어느 시에 시작된 나의 형벌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나의 작은 뱃속에 생각을 욱여넣는 고문이 나의 형벌에 추가되었다.
합리라는 허상, 공정이라는 거짓, 평화라는 전쟁 속에서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그것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를 시작했다. 그렇다. 아름다움. 그것을 찾는다면 이 형벌을 기꺼이 감내해 낼 용기가 생긴 것이다. 이런 욕망은 나를 스스로 고문하도록 하는 두 번째 형벌의 집행자였다.
욜로의 유행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오늘을 살라'는 말은 격언처럼 떠돈다. 하지만 '오늘'이 무엇인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있는 찰나에 불과하지 않은가. 오늘을 살라는 말은 살지 말라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오늘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맥락 속에서만 존재하도록 가르침 받은 것이다. 그런 뒤 '오늘을 살라'는 말로 삶의 맥락의 불을 잔혹하게 꺼버린다. 마침내 우리는 맥락을 살아야 하므로 스스로 존재하지도 못하고, 오늘을 살라는 말로 맥락으로서도 존재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태에 놓인다. 이 상태를 사람들은 '행복한 일상'이라 부른다.
이 모든 생각들은 사치다. 나에게 주어진 바위가 잠깐 가벼워진 것이다. 당장 배를 곯기 시작하면 다시 나는 생각을 내려놓고 바위를 굴리며, 바위가 짓이긴 빵조가리를 찾아 헤맬 것이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조금 더 고통스럽다. 원래의 삶 또한 고통이지만, 생각으로 인해 조금 더 고통스러워졌다. 아름다운 삶은 없다. 단지 그것이 존재하리라는 신앙적인 허상만 실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