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치매가 남긴 사랑의 잔해

by 이원소

할아버지는 또 그 질문을 꺼냈다.

“여긴… 어디야?”

창밖에 뻗은 나무 가지들이 겨울바람에 덜컹거렸다. 황량한 하늘 아래 오래된 아파트는 더없이 낯설었다. 거실 한구석에는 식은 차 한 잔과 반쯤 닳아버린 기억이 고여 있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창밖을 보며 말했다.

“여기 우리 집이에요. 당신이 직접 골랐던 집.”


그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내가 이 집을 골랐어? 기억이 안 나…”

그는 그 말을 할 때마다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되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그러나 끝내 실패한 얼굴. 할머니는 그 얼굴을 몇백 번, 몇천 번이나 보아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거실 한쪽 구석에는 오래된 사진첩이 있었다.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그 사진첩을 자주 보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날도 그녀는 사진첩을 열었다. 노란빛으로 바랜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 주던 날이었다.

“여기요, 이 사진 기억나요?”

그녀는 사진을 조심스레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사진을 받아든 뒤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거… 누군데?”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평온했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마저 잊은 사람이었다.

“당신이에요. 그리고 나.”

할머니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저 사람들은 행복해 보여. 나는… 나는 이런 얼굴이 아니야.”

그의 말에 할머니의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그가 말한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자신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이 그의 입술을 통해 부정당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사진첩을 덮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치 살아 있던 기억들이 모두 질식한 듯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갑자기 말했다.

“당신, 나랑 결혼했었다면서? 내가 당신을 좋아했었나 봐.”

그 말에 할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왜 기억이 안 나지? 나는 당신을… 정말 좋아했었나?”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어요. 아주 많이.”

그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런 내가 당신을 좋아할 자격이 있을까? 기억도 못 하면서.”

그의 목소리에는 자조 섞인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 그는 자신의 말을 몇 분 뒤면 잊어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오래전부터 작은 공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공책에는 그가 잊어버린 모든 것들이 적혀 있었다. 첫 만남, 결혼식, 첫 아이가 태어난 날,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웃었던 모든 순간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 공책을 읽을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거, 내가 쓴 거야?”

“아니요. 내가 쓴 거예요. 당신을 위해.”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왜? 왜 그런 걸 썼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미소를 지으며 공책을 덮었다.


어느 날 밤, 할머니는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그녀 곁에서 잠들지 못하고 서성였다.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지만, 어딘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당신… 아픈 거야?”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녀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떠나도,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내가 사랑했던 당신은… 항상 여기 있을 테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할아버지는 공책을 읽었다. 매일, 그리고 또 매일. 그러나 그는 읽고 나서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거 내가 쓴 거야?”

그는 늘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 공책을 읽으며 그는 뭔가 그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누군지, 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지 그리웠다.


그날 밤 그는 혼잣말을 했다.

“나는… 누구였지? 나는… 누구를 사랑했지?”

그의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다음날, 공책이 바람에 휘날렸다. "오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