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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유치원 vs 숲유치원, 치열했던 그 해 가을

생각보다 뜨거웠던 유치원 선택 전쟁의 기록.

by 소금라떼


아이를 낳기 전,


남편과 나는 대부분의 일에 대해 크게 논쟁을 벌일 일이 없었다.

각자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만나, 함께하는 여행의 재미를 알아버린 우리는 좋은 여행 파트너이자 부부가 되었다. 식성 빼고는 취향이 비슷했다.


아이를 가질까 고민하던 시절에도, "만약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우리 둘이 재미있게 여행 다니며 살자"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남편 험담이 오갈 때면, 나는 잠시 고민하기도 했었다.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며 공감대를 형성할지

vs

"내 남편은 그렇지 않은데"라고 말하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지


물론 내 남편이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서로의 단점을 굳이 들춰내지 않기로 한 암묵적인 약속 덕분이었다.




내 기억에 우리가 가장 크게 다툰 사건은 결혼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어느 주말이었다. 어느 부부건 신호 초에는 아주 사소한 일로 다툼을 벌인다고 한다. 누구네 집은 치약 짜는 방식, 누구네는 욕실에 두루마리 휴지를 거는 방향으로 싸운다던데, 우리에게는 그게 바로 '정리에 쏟는 시간'이었다. 교육 일정이 많아 정장을 자주 입는 나에게, 옷방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은 중요했다. 정장은 아웃렛에서 50~80만 원 정도. 봄가을/여름/겨울용 정장 여러 벌 갖추기 때문에 이건 내게 꽤 큰 지출이었다. 오래 입기 위해, 옷 상태뿐만 아니라 몸 관리까지 신경 썼다. 살이 쪄서 더 큰 사이즈의 옷을 사는 건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 비해 남편은 옷방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퇴근하면 휙휙 던져 놓아 그곳은 늘 정신이 없었다. 평일엔 눈 감고 넘겨야만 했지만, 휴일이 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당장 그 옷방을 정리하고 싶었다.


"오늘 우리 옷방 정리 좀 하자"
"날씨가 이렇게 좋은 데, 게다가 일요일인데 집에서 정리하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나는 일주일을 벼르고 벼른 일이었지만, 남편에게는 월화수목금 내내 회사에서 시달린 후, 주말만큼은 쉬고 싶었는데 날벼락이 떨어진 기분이었나 보다. 내가 물러서지 않자 훅! 들어온 남편의 한 마디.


"나는 네가 하는 행동이 100% 다 맘에 들어서 말을 안 하는 줄 알아? 그냥 너는 그렇구나.. 생각하고 넘기는 거야."


아,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남편이라고 불편한 점이 없었을 리 없었다. 참고 참다가 터뜨린 나와는 달리, 남편은 그걸 일일이 꺼내놓고 따져 묻기보다는 그저 이해하고 사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당신은 어때?"
"나는 이번 달 말까지 당신이 이걸 해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할 것 같아?"


이 대화 방식은 웬만한 문제에서는 다 통하곤 했다.



하지만, 아이의 유치원 결정을 앞두고 우리는 전쟁 같은 언쟁을 벌였다.


이 전쟁을 마친 후, 1년이 지난 지금에서 "우리 그때 왜 그렇게 치열했지?"라며 헛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부모가 된 이상, 우리는 아이를 위해 더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할 테니까.


아이는 만 3세부터 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게 된다. 즉, 종일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놀이학교에 보냈던 만 2세의 9월부터, 우리는 참으로 치열하게 각자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남편은 회사 동료들의 영향을 받아, 아이를 '영어유치원(영유)'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친한 지인들 대부분이 영유를 보내본 경험이 있거나, 현재 보내고 있었고, 만족도도 높았다. 더군다나 어떤 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이가 하나인데, 왜 영유에 안 보내?"


일반 유치원에 보내는 것보다 적게는 2배, 많게는 3배 이상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아이가 둘 이상이라면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한 명인데 고민할 이유가 있냐는 것이었다.


반면 나는 이 시기에는 '영어 노출'에 쏟는 시간에 일반 유치원에 다니며 더 많은 것을 경험하기를 원했다. 특히, 흔히 말하는 '아웃풋'이 잘 나온다는 영유에서 시행하고 있는 '한국어 금지' 방침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창 말을 배우고, 다양한 표현을 경험해야 하는 아이에게 우리말을 쓰지 말라고 하는 건, 영어 실력은 늘지 몰라도 여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그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물론 나도 영어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더군다나 예민한 감성을 지닌 내 아이에게는, '영어 습득'의 장점보다 부작용이 더 클 거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만큼은 내 생각이 맞다고 확신했기에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남편도 사실 영유의 커리큘럼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영유를 보내지 않았을 때 추후 아이가 학교에서 뒤처질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학군지에서 자란 남편은 그것에 대해 나보다 더 크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 부분을 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대치동의 학원가 이야기, 7세 고시 등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나 또한 문득문득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재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놓치고 갈 순 없었다. 심지어 나는 아이가 마음껏 뛰놀 수 있게 하기 위해 '숲 유치원'을 보내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즈음 발생한 일 때문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의 "밖에"라는 말만 들리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바로 놓고 가장 먼저 신발을 신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는 아이다. 활동량이 많은 에너자이저인 아이는 밖에서 2~3시간 이상은 뛰어놀아야 집에 오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내가 회사에 복직한 후, 현저하게 바깥놀이 시간이 줄자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느 날, 잠에 들기 전 아이는 이렇게 말하며 엉엉 한참을 울다 잠에 들었다.


"엄마, 오늘은 놀이터에 가는 날인데 안 갔어. 수업만 했어."


'이상하네.. 월요일인데...'

매주 월요일 오전은 놀이학교 앞에 있는 공원에서 바깥놀이를 하는 날이다. 아이는 그 때문에 월요일을 참 좋아했었다. 다음 날, 선생님께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알고 보니 다가올 2학기 학부모 참여 수업 준비 때문에 최근 놀이터에 가지를 못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참 아쉬운 답변이었다. 참여수업 때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선생님의 부담감은 이해하지만, 사실 내 입장에서는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또래 친구들과 함께 놀이하는 모습만 봐도 행복했을 것이다.


다행히 선생님은 아이의 입장을 이해해 주셨는지, 나의 컴플레인을 의식해서인지 다음 날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아이의 영상을 보내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후에 전업주부로 아이로 돌보고 있는 같은 반 아이의 엄마는 이로 인해 컴플레인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이터는 하원하고 집에 와서 자신이 데리고 나가면 되니, 원에서는 엄마가 해 줄 수 없는 수업 활동을 많이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복직으로 인해 낮동안 내가 해줄 수 없는 일. 그중에서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바깥놀이'를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곳에 아이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숲 유치원'이라 믿었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너무 튀는 선택이었다. 영유도 아니고 일반 유치원도 아닌 숲유치원이라니. 반대는 더욱 거셌다.


D-DAY는 11월 1일. '처음학교로'에서 유치원 입학신청이 열리는 날이다.


처음학교로(https://enter.childinfo.go.kr/icms/main/IntroPage.html)는 유보통합포털로 어린이집 입소대기, 유치원 입학신청을 할 수 있는 사이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치원 입학설명회는 10월에 열린다. 영어유치원은 그보다 빠른 9월 중순부터 시작된다. 나는 영유 설명회는 과감히 스킵하기로 했다. 연차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보내지 않을 곳에 내 소중한 연차를 쓸 수는 없었다.


"영유를 안 보내는 건 불안하지만, 그렇다고 시스템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니까 포기할게. 대신 숲유치원은 안 돼."


숲유치원에서 신나게 뛰어놀면 지금이야 좋겠지만, 나중에 학교에 가서 앉아 있는 걸 힘들어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나는 실내 활동도 충분히 있고, 신체 활동이 두뇌 발달과 집중력에 좋다는 연구도 제시했지만 소용없었다. 더군다나 집에서 가장 셔틀을 가장 오래 타야 하는 곳에 아이를 보내는 게 맞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렇다. 숲유치원은 매일 숲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 때문에 집과의 거리가 멀어 다른 유치원에 비해 셔틀버스를 오래 타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 한 발짝씩 물러났다. 한 달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남편은 영유를 포기했고, 나는 숲유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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