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얄팍한 생존 방식
나는 아직도 가끔 너의 이름을 부른다. 너의 얼굴이 까마득하다. 어떻게 생겼더라, 나의 맞은편에 앉아 가만가만 나를 바라보던 다정한 너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건네던 따스함은 아직도 마음에 이불처럼 덮여 있는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너의 생김새나 표정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너의 생김새만 잊은 것은 아니다. 나를 부르던 목소리도, 함께 다녔던 길목에서의 추억들도 후- 불어서 흩어져버린 먼지처럼 다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난 이런 '잊음'이 좋다. 불편한 감정 없이 너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줄 수 있게 되어 정말로 마음이 편하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가끔 너의 이름을 부른다. 세탁기에 수건을 모아 넣다가도, 피곤한 몸을 침대 위에 누이다가도 습관처럼 너의 이름을.
너의 이름이 내 입 안에서 소리가 되어 굴러나올 때, 평생을 부를 일이 없어진 너를 태연히 다시 불러내는 내가 제정신이 아닌건가 싶었다. 습관이 너무 깊었던 걸까? 아니면 그토록이나 너를 깊게 사랑했던 것인가? 불쑥 너의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애써 입을 단속하려 노력도 해보았다. 덕분에 이제는 그 횟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문득 너를 부른다. 고쳐지지 않는 지독한 습관? 너는 대체 뭐였길래 아직도 내 입 속에 남아 있을까.
양심적으로 고백하건대, 수많은 날이 흘렀음에도 내 삶의 구석구석 습관처럼 너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은 내가 너를 그토록 깊게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사실은 너의 이름을 자꾸 다시 말할 때마다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실은 내가 너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쉬이 널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 만일 그 시간이 나에게 조금 더 무게가 있었더라면, 너와 주고 받았던 것이 서로의 삶을 바라봐주었던 그런 사랑이었다면 나는 이토록 가볍게 널 불러댈 수 없었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너와 보낸 숱한 낮과 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서로를 바라보는 일보다 더 중요했던 사람이었다. 너를 부르면서도 너를 바라보기보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너를 부르는 일은 나에게 나를 부르는 일과 같았다. 너를 불러내어, 너를 통해 비춰지는 나를 발견하는 일. 그렇게 치사하고 연약하게 나는 너를 통해 나의 존재와 의미를 확인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나의 얄팍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런 나에게 너와의 관계의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사건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엔 당시 나는 너무 허접했다.
네가 떠나고 한참이 흐른 지금, 아직도 너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는 이따금 생각했다.
'네가 전혀 그립지 않다. 그런데도 내가 너를 부른다는 이 사실은, 여전히 이기적인 내가 나를 확인하고 싶어서인가보다.'
그저 인정한다. 나의 허접했음을. 미안하단 말은 차마 맘 속으로도 하지 못한다. 너에게도 내가 이젠 아무 효력없는 기억이 되었을테니 굳이 나의 실례를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젠 좀 덜 허접하고 싶어서 조금 남아있는 이 지긋지긋한 습관으로부터 달아나려 애를 써본다.
다음 번에는 정말로 상대방을 불러 줄 수 있는 내가 되어가고 있기를 기대하며, 나의 입 속에서 너의 이름을 덜어낸다.
브로콜리 너마저 -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