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날이 있다.
심연으로 깊이깊이 가라앉는 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희망은 손톱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그런 날.
속에 불덩이가 있는 날은 시원한 맥주라도 꺼내 벌컥벌컥 마시련만
이런 날은 속도 서늘하여 맥주에도 손이 가지 않는다.
어젯밤이 그런 날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 홀로 거실에 나와 TV를 켠다.
생각과 감정을 마취할 시간이다. TV를 켜고 붉고 굵은 N을 누른다.
현실망각엔 드라마가 최고의 약이다.
이럴 때 보는 드라마는 현실과 동떨어 질수록 좋다.
잔잔한 것 탈락. 현실에 있을법한 이야기 탈락.
귀신이 나와도 좋고, 전공의를 3개나 딴 의사가 나와도 좋고, 임금님도 오케이다.
시청 후 심란한 꿈을 꾸지 않으려면 재벌가 본부장님과 평사원의 로맨스가 가장 좋긴 하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아리고, 머리는 복잡하지만 잠시 잠시 잊는 순간들이 생긴다.
요즘 드라마는 전개가 빨라서 쉽게 몰입하게 된다.
이렇게 점점 빠져 들어 보고 있노라면 드라마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고맙기까지 하다.
나를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한 발 꺼내주었으니.
다음 날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면 딱 한편 혹은 12시까지로 마감시간을 마음속으로 정한다.
적당히 멍-해지게 봤으면 이제 되었다.
TV를 끄고 나면 다시 현실로의 복귀다.
드라마를 본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통을 느끼는 시간은 드라마가 잠시 잠시 채갔으니 그걸로 되었다. 오늘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숨통만 틔면 된다.
자고 나면 어제의 일은 또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P.S. 천사랑님, 구원 본부장님이랑 참 잘 어울려요. 행복하세요.
(사진 출처_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