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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랬구나 Jul 14. 2023

시어머니의 라메르크림을 가져왔다

신혼 때 시댁에 가서 자고 올 일이 생기면 화장품 샘플들을 가지고 가서 발랐다. 거울도 없는 방에서 쭈그려 앉아 바르는 것을 보신 시어머니께서는 피부가 특별히 예민해서 내 것을 꼭 챙겨 다녀야 하는 것이 아니면 앞으로는 안방에 들어와서 화장대에 편히 앉아 당신 것을 바르라 하셨다. 말씀은 감사했지만 아버님 어머님이 쓰시는 안방에 쉽게 들어가긴 어려웠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 기저귀 챙기기만도 벅찬 나는 내 화장품을 챙겨가지 않았다. 또 그만큼 세월이 흘러 시댁 안방문 열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님의 화장대엔 늘 설화수가 스킨 로션 에센스 크림 풀세트로 있었다. 이때 아님 내가 또 언제 설화수를 발라보겠냐며 아침저녁으로 듬뿍듬뿍 바르곤 했다.




올봄, 아버님 생신으로 시댁을 방문했고(시댁은 우리 집에서 차로 4시간 거리라 가면 무조건 자고 온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1년에 다섯 번 정도 바르는 설화수를 바르러 가볼까나 하고 안방 어머님의 화장대로 갔다. 안경을 벗고 어디 보자 설화수 윤조에센스 어디 있더라 하며 화장대를 둘러보는데 오잉?! 안경을 다시 썼다.


내가 본 게 맞다면 이것은!!!

동네 언니들이 말하던 그 엄청 좋은데 엄청 비싸다는 라메르??

유명 여배우가 기내에서 한 통 다 바른다는 그 크림??

그 라메르를 내가 여기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허허허


일단 크림병을 잡아 든다. 크기에 비해 묵직함이 느껴진다. 뽀얀 유리병이 손에 착 들어오는 느낌이 좋다. 돌돌돌 뚜껑을 열어 그분을 만나본다. 되직한 질감이 눈으로도 느껴진다. 크림병아래 스패츌라가 놓여있기에 소심하게 한번 떠 손등에 얹어본다. 에잇 너무 적다. 내가 이거 언제 또 발라보겠니 이번엔 과감하게 떠 보자 듬뿍. 파우더리 하며 포근포근한 향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이제 현실 자각 타임. 그런데 어머님이 이 크림을 직접 사진 않으셨을 테고, 뭔가 면세점 느낌이 물씬 난다. 누굴까? 어머님께 이런 고가의 크림을 선물한 사람이. 외국 생활하시다 최근 귀국하신 막내이모님? 아니면 외국 여행을 자주 가는 시누? 누군가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이 크림을 골랐을 텐데 나는 얼씨구나하고 바르기만 했구나 생각하니 좀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어머님께 설화수 한번 못 사드렸는데. 다음엔 나도 어머님께 크림을 하나 선물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안방 문을 닫고 나왔다.


이렇게 저렇게 하루를 보내고 거실에서 아이들과 TV를 보고 있는데 어머님께서 안방에서 나를 부르셨다. 네 어머니 하며 안방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어머님이 라메르 크림을 원래의 초록색 상자에 넣어서 한 손에 들고 계셨다. 살짝 놀랐으나 크림 많이 발랐다고 뭐라고 하실 분은 절대 아니라는 믿음은 있었다.


"ㅇㅇ애미야, 이거 내가 조금 쓴 건데 좋은 거라고 하더라. 너만 괜찮으면 주고 싶은데 바를래?"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셨다.

주책맞은 자본주의 입꼬리는 이미 올라가고 있었지만 애써 담담한 척


"어머님 선물 받으신 거 같은데 어머님 쓰세요."


"선물 받은 건 맞는데 그래도 써봤잖아. 그리고 받은 지 좀 지나서 내가 다 쓴 줄 알 거야 새거 아니라 미안한데 진짜 너 좋으면 가져가."


"헤헤 그럼 전 좋아요 어머니. 감사해요."


그렇게 초록 상자는 서울행 캐리어에 들어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남편에게 크림 이야기를 했다. 어머님께는 죄송하지만 순간 너무 좋아 넙죽 받아왔노라고 고백했다. 남편은 껄껄 웃으며 잘했다고 하며 근데 그게 도대체 얼마짜리냐고 물었다. 나에겐 구매 고려 대상도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가격도 몰랐다. 그래 알아나 보자 하고 검색해 보니 세상에 지금 우리 차 트렁크에 계신 30ml 그분이 295,000원이시란다. 1ml에 1만 원에 육박한다. 로드샵 브랜드만 바르고 아이들 크림을 같이 바르던 우리는 세상에 이런 크림도 있냐며 놀랐다.




라메르를 시어머님께서 하사하셨노라며 지인들에게 말하면 첫 질문이 그 크림 정말 그렇게 좋으냐? 였다.

음, 좋긴 좋다. 정말 좋다. 그러나 그 돈을 주고 바를만하냐 그건 또 의문이다.


집에 모시고 온 그분을 아침저녁으로 기분 좋게 바르며 어머님의 사랑을 느낀다.

어머님께 아침저녁으로 감사의 하트를 멀리멀리 보내드리고 있는데 받으셨으려나.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 사랑합니다 ♡


(이미지 출처_라메르 코리아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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