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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랬구나 Aug 07. 2023

누워서 갈 수 있는 기차가 있다구요?

서해금빛열차에만 있는 온돌마루실

어린 시절 명절이면 기차로 할아버지댁에 가곤 했었다. 

그때 딱 한번 기차 침대칸을 타본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이 몹시 강렬했다. 


할아버지 댁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 기차를 타야 했는데, 지금처럼 KTX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할아버지 댁은 정말 시골이어서 작은 역에 내려야 했기에 통일호를 타고 갔다. 더구나 지금처럼 자가용이 흔한 시대도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이용했기에 빽빽하게 통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로 명절의 기차는 그야말로 너무도 힘든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느 설 명절에는 사람들의 후끈한 열기에 답답함을 느낀 다섯 살 무렵의 

내가 내복바람으로 유리창에 착 붙어 갔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빠가 누워가는 침대칸이 있다면서 이번엔 편하게 누워갈 수 있다 하셨다. 

집에도 없는 침대가 기차에 있다니! 

네다섯 시간을 앉아가려면 고역이었는데 누워갈 수 있다니! 


우리 가족만 누워가던 침대칸은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다. 30년도 더 전이어서 흐릿한 기억을 붙들어 보자면 위아래 두 칸으로 있었고 위칸에 사다리 같은 것을 타고 올라갔었다. 보통 기차 높이를 반으로 나눈 거다 보니 꼬마인 내가 앉아도 천장이 머리에 닿았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만 누워서 오손도손 가는 게 어린 나의 기억엔 큰 재미로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이유에선가 그 후론 한 번도 다시 타 본 적이 없고 다시 볼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서해금빛열차의 온돌마루실!

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너무 타보고 싶었다.

서해금빛열차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관광지 위주로 운행하는 한국철도공사의 관광열차의 한 종류다. 


이미지 출처_한국철도공사 웹페이지


서해금빛열차를 타 보고는 싶은데 어딜 가야 하나 열차의 운행 노선도를 살펴보았다. 

역마다 모두 가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생물학자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딱 좋은 국립생태원이 장항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여기다 장항역!

이미지 출처_한국철도공사 웹페이지

  

문제는 예매다. 

온돌마루실은 이 열차에 단 9실밖에 없어서 나름 치열하다.

예매는 한 달 전부터 가능하다. 가기로 한 날 딱 한 달 전에 예매페이지를 열었는데 운 좋게 1실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고 싶어 했으면서 왜 망설여서는 그 사이에 매진이 되어버렸다. 나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웠으나 어쩌겠는가. 일단 내려가는 것은 일반실로, 다음 날 올라오는 것은 온돌마루실로 예매를 해놨다. 


용산역에서 장항역까지는 3시간이 걸린다. 당일치기도 가능하겠지만 멀리 간 김에 하룻밤 자고 오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근처 서천에 숙소를 예약했다. 떠나기 하루 전날까지 나는 수시로 코레일을 들락거리며 온돌마루실 취소가 나오나 기다렸다. 


그러다 출발 전 밤. 

자기 전 혹시나 하고 조회를 해보니 딱 1실이 나왔다! 

오예!!!!!!!!!! 흥분된 마음으로 결제를 진행했다. 

혹시나 가고자 하는 분들은 전날 밤까지 조회를 포기하지 마시길!!



온돌마루실이 궁금해서 이 글을 눌러봤으나 서론이 너무 길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만큼 구구절절 나에겐 온돌마루실이 절실했고 간절했다.


태어나서 기차를 몇 번 안 타본 일명 서울촌놈 우리 집 아이들은 그냥 기차만으로도 설레는데 누워가는 기차라니 출발 전날부터 쉽게 잠들지 못했다. 늦게 자 놓고선 기차 놓친다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나를 깨웠다.

용산역 플랫폼에 내려가서도 기차가 올 때까지 지금 몇 분이야?를 1분 간격으로 물어댔다. 


드디어 서해금빛열차가 주황빛깔을 뽐내며 들어왔다. 


요건 장항역에 내려서 찍은 사진



온돌마루실은 최소 3인 최대 6인까지 이용할 수 있고 각자의 기차요금에 1 실당 3만 원의 요금이 추가된다. 

6인까지 이용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성인 6인이 타면 조금 좁을 수 있겠다.


객실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정확하진 않지만 무궁화를 개조해서 만든 느낌이랄까. KTX의 세련된 객실만 타봤던 녀석들이라 낡은 기차에 흠칫 놀라는 듯하였으나 온돌마루가 주는 특별함에 이내 다시 신났다. 


133센티미터 우리 집 막내는 벌렁 누우면 가로든 세로든 발이 닿지 않는다. 

160센티미터 엄마가 누워보니 사진 속 우리 집 막내처럼 누울 수는 없고 창가 쪽으로 다리를 향하게 누우면 머리 위로 10센티도 더 남는다. 좌식 등받이 의자가 6개 준비되어 있고, 바닥에 온돌온도조절장치가 있다.


여행으로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여행의 설렘을 배가시켜 줄 기차다.

함께하는 가족들과 이야기 나누기도 편하고, 힘들면 누워서 잘 수도 있고, 둘러앉아 간식 먹기도 좋다.

아산을 지나서부터는 도시보다는 자연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서해금빛열차의 온돌마루실은 마음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이 기차는 KTX가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목적지까지 소요되는 시간도 길고 정차하는 역도 많다. 

또 온돌마루실의 특성상 3명 이상 무리 지어 타기 때문에 시끌시끌하다. 



그동안 기차를 탈 때는 심심해할 아이들을 위해 게임기, 탭, 보조배터리, 헤드폰까지 챙겨갔었다. 

이번에도 지루하면 영상이라도 보렴하고 헤드폰을 챙기려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심심하고 지루하다고 기차에서 울어재낄 나이도 아니니 한번 부딪혀보기로 했다. 


나는 이 아이들보다 더 어려서도 유튜브 없이 다섯 시간도 타고 갔었는데 라는 생각에 미치자 내가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나를 귀찮게 하는 상황을 못 견뎌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심심할 틈도 주지 않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심심하고 지루해봐야 무언가 새로운 생각도 하고, 앞에 앉은 나의 가족에게도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창밖의 무언가를 보며 생각이라는 것을 해볼 텐데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바쁜 사람들로 가득 찬 KTX를 탈 때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3시간을 잘 지냈다. 간식도 먹고 책도 보고, 엄마품에 안겨 누워서 쉬기도 하고 

창밖의 구름 모양 벼 심어진 모양까지도 보며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댔다. 


쨍한 날씨 덕분에 창 밖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차로 이동할 땐 생각도 못해본 독서를 기차 안에서는 할 수 있어서 좋다. 내리기 한 시간 전쯤부터는 각자 독서의 시간을 가졌다. 사실 몹시 졸렸으나 장항역에 못 내릴까 봐 걱정된다며 눕지도 못하게 하는 녀석들 덕분에 책을 제법 읽었다.

말 그대로 하늘색 하늘과 초록의 논 색의 조화가 아름답다


속도와 편리함이 최고의 가치인 듯 경쟁하는 시대에서, 잠시 숨 고르기 하는 시간이었다.

정해진 속도로 정해진 길로만 다니는 기차가 마치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처럼 대단해 보였다.

기차처럼 꾸준하고 묵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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