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호기롭게 시작한 주말농장 텃밭 가꾸기.
이런저런 채소들을 기르는 가운데, 남편과 아이들에게 여기 이 만큼은 내 땅이야! 를 외치며 봉숭아씨앗을 뿌렸다. 종묘사에서 구매한 것이 아닌, 생활용품점에서 구매한 씨앗이라 발아율을 기대하지 않고 쭉 줄뿌림을 하였는데 매우 빽빽하게 새싹이 돋아나 눈물을 머금고 솎아주었다.
험난했던 이번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의 봉숭아들은 잘 견뎌주었다.
늘 밭에 도착하면 아이들이 먼저 달려가 밭의 상황을 큰 소리로 알려준다.
엄마 봉숭아 꽃 피었어!
그래?
후다닥 달려가보니 다양한 색으로 예쁘게 핀 봉숭아꽃들이 반겨주었다.
사실 요즘 네일숍에 가면 몹시도 화려하고 다양한 네일 컬러들이 즐비하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먹지도 못하는 봉숭아를 주말농장 밭 한가운데에서 정성스레 키운 이유가 있다.
봉숭아 꽃은 추억이기 때문이다.
딱 수박 먹을 계절 즈음, 외할머니 댁에 가면 앞마당에 봉숭아 꽃이 피어있었다.
사촌오빠 우리 오빠 사촌남자 동생들이 우당탕 거리는 틈에 사촌언니와 나는 진지하게 봉숭아꽃을 땄다.
솜씨 야무진 언니가 총총총 빻고, 검정 비닐봉지를 잘라 짓이겨진 봉숭아 꽃잎 덩어리를 손에 얹어 실로 칭칭 동여매주었다. 피가 안 통하고 가렵기도 하고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어 불편했지만, 물이 빨갛게 잘 들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하룻밤을 잤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나의 손톱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하며 검정봉지를 빼냈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언니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봉숭아 물이 흐릿하게 들어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같이 물을 들인 외할머니도, 엄마도, 이모도, 언니도 예쁘고 진한 다홍색 손톱으로 변했는데 나만 흐린 주황이라 어린 마음에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언니가 한번 더 물들여 주었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후로 한참 봉숭아물을 들여본 적이 없었는데 주말농장을 하며 오랜만에 다시 봉숭아 물을 들여본다.
똑똑 꽃을 따고, 뚝뚝 꽃잎도 딴다. 봉숭아꽃의 초록 이파리에도 물을 들게 하는 색소가 있다고 어린 시절 TV에서 본 기억이 있다. 봉숭아 꽃들은 각각 색은 달라도 뭔가 봉숭아만의 톤이 있다고나 할까? 형광색 빛이 나는 꽃들을 봉지 가득 담으니 쨍한 색이 딱 여름 꽃이다 싶다.
집에 가져와 봉지째로 콩콩콩 빻는다. 아, 그래 이 냄새야. 봉숭아 꽃이 짓이겨지면 나는 특유의 내음을 맡으니 어린 시절 생각이 더욱 생생해진다. 이번엔 추억의 검정봉지 대신 신문물 등장이다. 비닐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잘라서 손가락에 씌웠다. 관심도 없는 아들들 옆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며 혼자 열심히 감는다. 비닐장갑의 마무리는 의료용 테이프로 했다. 왼손을 먼저 내가 하고, 오른손은 남편에게 부탁했다. (나중에 결과물을 보니 미세하지만 남편이 해준 쪽이 더 잘 물들었다) 양손을 다 완성하고 나니 호러영화 한 장면 같은 손이 되었지만 설레는 맘으로 내일을 기다려본다. 개구기 손가락처럼 뭉툭해진 손끝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불편했지만 너무나 신이 났다. 얼마 만에 들여보는 봉숭아물이며, 얼마 만에 느껴보는 설렘인가!
옆에 있던 초2 아들에게 너도 하나 해볼래 물어보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 한다 한다. 먼저 잠든 감수성 충만한 첫째는 혹시 해보고 싶을지 몰라서 남은 봉숭아 꽃을 냉장고에 넣고 잤으나 불필요한 짓이었다.
두둥! 드디어 다음날 아침!! 어렸을 때 검정봉지와 실의 조합으로 작업했을 땐 아침에 일어나면 한 두 개는 빠져있을 때도 있었다. 열개 모두 나의 손끝에 잘 붙어있나 확인부 터했다. 다행히 모두 잘 붙어있었다. 견고하게 붙어있는 의료용 테이프를 뜯어내고 꽃 덩어리를 떼어냈다.
오~ 내 인생 최고의 찐함이다.
다홍색을 넘어 검붉게 물든 친구들의 손을 늘 부러워했었는데, 검붉게 까지는 아니고 예쁜 다홍색이었다.
두 남자의 무관심과 한 남자의 협조 속에 완성한 나의 봉숭아물들이기는 매우 만족으로 마무리되었다.
한동안 글을 못쓰고 있던 차에 봉숭아 물들인 걸로 글 한편 써야겠다 생각했는데
손톱을 잘라낸 오늘에서야 글을 완성했다.
(대문사진_픽사베이/ 본문사진_본인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