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그녀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by 주택야독

(2024년 1월 14일 '나의 기록'을 다듬어 올린 글입니다.)




택배기사인 난 일하면서 독서를 한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거나 탈 때.

가벼운 물건을 들고 배송지까지 걸어갈 때.

계단을 오르내릴 때 등..


배움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

성장에 대한 강박과 집착 때문인지,

난 몸은 움직이면서도,

정신은 핸드폰 속 읽을 거리에 집중한다.


읽을 거리는 많다.

웹소설, 전자책, 성경, 뉴스 기사, 스포츠 기사 등..




최근 여자친구와 사업 하나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아이템은 좋은데, 당장 실현하기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여건이 될 때까지 준비를 하겠노라 결심했다.


다음 날, 다시 난 트럭을 타고 출근한다.

분류와 상차 작업을 마치고, 첫 배송지에 도착한다.

한 손에 첫 배송 박스를 들고, 다른 손에 핸드폰을 꺼내 든다.


핸드폰의 배경화면을 보는데 순간 멍해진다.


'나 이제 뭐 읽어야하지?'


혼란스럽다.

여러 선택지가 나에게 주어졌다.


각각의 선택지들이 날 끌어당긴다.

팽팽해진 그들의 끈이 사방에서 날 압박한다.

숨이 답답해지기 시작하고, 다급함이 차오른다.



사업 분야에 대한 책.

창업에 대한 책.


글쓰기와 작법에 대한 책.

웹소설에 대한 책.

짧은 책력을 채우기 위한 명작 소설 책.

시장 조사 및 인풋을 위한 인기 웹소설들.


루틴화 되어 있던 성경 말씀.

열정이 희미해져 읽다 말게 된 스토리성경 책.


그냥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자기개발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트렌디한 전자책들까지.



복잡한 선택지들로 머리가 까맣게 먹칠된다.

지금 이 순간 무슨 책을 읽어야할지에 고민 때문에 독서에 싫증이 나버린다.

게다가 책 진도와 속독에 대한 강박과 집착마저 날 옥죄어 온다.


진짜 가벼운 내용의 웹소설도 읽어봤지만,

애초에 읽는 것 자체에 피로감이 심한 상태였다.



한정된 시간 속 성장 강박이란 담쟁이가 가득 채운 내 머리는 스스로를 이렇게 통제했다.


'독서는 일할 때만 틈틈히 읽고,

퇴근하면 무조건 글 써야해.'


멈출 시간이 없다고 느껴졌다.

스스로 이렇게 되뇌인다.


지금 이 짧은 시간도 아껴서 얼른 읽어야 해.

빨리 배워야 해.

빨리 해내야 해.

빨리 이뤄야 해.

.

.

.


뚝!



내 안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잡고 있던 무거운 줄을 그냥 놓아버린 느낌이었다.


무기력이 찾아왔고 자포자기하는 생각들이 차올랐다.

우울함은 덤이었다.


핸드폰을 켜놓고 바쁘게 페이지를 넘겼던 나였지만,

지금 내 손가락은 홈화면에서 무얼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우연히 터치된 어플이 있었다.


갤러리였다.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이 담긴,

나 그리고 그녀의 역사가 담긴 장소였다.



'스토리 기능'이란 것이 있었다.

저장된 사진과 영상을 임의로 모아, 슬라이드 쇼를 만들어주는 기능이었다.


되게 좋았다.

2016년부터의 우리 연애 기록과 삶의 기록이 담겨있었다.


7년 전 사진도 꽤나 보았다.

참 이곳 저곳 많이 돌아다니고, 이짓 저짓 많은 걸 해왔더라.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파서 전화를 했다.

처음에는 바로 받지 않았다.

두 번째 또한 받지 않았다.


'어, 이럴리가 없는데?'


평소 공상과 상상력이 풍부한 나로선,

온갖 생각이 다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란 생각으로 5분을 더 기다려보았다.


연락이 없었다.

심각한 표정을 얼굴에 걸친 채,

세번째 시도를 했다.


'어...?'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려 노력했다.


지금 트럭 안엔 짐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 가면 마감 시간 못 지킨다.

집까진 20분 정도다.

퇴근 시간이라 막히면 30분 정도.

경찰에 신고할까?

윗집 집주인 아저씨한테 연락이라도 해볼까?

집 전화가 없어서 더 전화해볼 번호도 없다니, 집 전화기 설치해야하나?


이외에도 미처 적지 못할 생각들이 섬광처럼 터지듯 머릿 속을 어지럽혔다.


그때 마침 벨소리가 울렸다.

놀란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듯,

핸드폰 화면 안에는 그녀의 애칭이 적혀있었다.


'♡내 뿌우인♡'


정말 깊고 굵은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말하길,

거북이 어항을 치우는 중이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물갈이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정말 별 일이 일어난 줄만 알았다.


스스로 바보 같단 생각에 자괴감이 몰려왔지만,

안도감에 비할 바가 없었다.



한 가지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있다면, 그건 필시 그녀일거라는 생각이었다.


감사했다.

축복받았음을 느꼈다.


막연한 두려움의 안개가 거치기 시작했다.

힘이 났고, 또 하루를 버틸 체력이 생겼다.


아자, 아자.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