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흐흐. 이상해.”
시뻘건 눈밭 위, 신체의 여러 부위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귀여운 꽃을 그리던 그녀가 웃었다. 연필 끝으로 스케치북 위를 수놓던 나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시야 한가득 검붉은 빛이 차올랐다. 스케치북에 닿아 있던 연필심이 톡 분질러졌다. 새삼스레 이 잔혹극 속에서 평온한 내가 놀라웠다.
“... 네?”
"새끼 기린 같았는데, 처음에는."
그녀의 손길을 따라 꽃잎이 하나씩 생겨났다.
"다리를 파들파들 떨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말이야. 근데 지금은 완전 이상해. 종이에다가 날 따라 하는 거야?"
작은 살인자가 마지막 꽃잎을 완성하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를 지배하던 두려움은 사라져 있었고, 스케치북에는 그녀를 보며 그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나 자신조차, 지금 이 감정이 어떤 이름을 가져야 할지 몰랐다.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이 머릿속에 떠다닐 뿐이었다.
오늘 그녀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녀는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통해, 나는 내 이상을 발견할 것이다.
모두 근거가 없었지만, 머릿속에서 확신을 갖고 있던 것들이었다.
발밑에 널브러진 신체 조각들은 이제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그것들을 나와 같은 '인간'의 사체라고 느낄 수 없었다. 위선적인 존엄의 베일이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기 때문일까? 조각난 형체보다는 그녀가 그 위에 그려 넣는 꽃잎이 더 선명해 보였다.
축 내려앉은 겨울밤의 무겁고 습한 공기 사이로, 이제는 잘 느껴지지도 않는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작은 살인자는 자신이 그린 한 송이의 꽃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붉은 덩어리에 다시 정성스럽게 꽃잎을 그려 넣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기억이 없어. 처음 눈 떴을 땐 낯선 집이었고. 방 한가득 박스가 쌓여 있었지. 박스를 열어보니까, 주사기와 약이 꽉 들어차있었어. 그리고 메모가 적힌 종이가 하나 있더라. 이걸 놓으면 온몸에 힘이 풀리고, 살이 연해진다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짜인지 궁금하잖아? 방 한쪽 벽에는 날카로운 게 잔뜩 걸려있었고, 마침 창밖으로 사람이 하나 지나가더라고.”
숨을 멈추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어떻게 사람을 칼로 자를 수 있었는지, 왜 저 거대한 남자 셋이 저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무너졌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녀가 들고 있던 주사. 기술의 정점이라 불리던 죽지 않는 주사를 무력화하는, 그 모든 시스템을 비웃는, 작은 유리병 하나. 그걸 만든 건 누구였을까? 왜 그녀에게 보내졌던 걸까? 왜, 하필 그녀였을까?
“그냥 몰래 따라가서, 쿡 찔렀지. 그랬더니 바보처럼 머리를 땅에 박고 고꾸라지는 거야! 그래서 엉덩이를 걷어찼지. 푸히히. 그리고 얘네들처럼 예쁘게 만들어줬어.” 그녀는 생일 선물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깔깔 웃었다.
그녀에겐 죄책감도, 연민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케이크가 있기에, 먹어버린 것뿐이었다. 그 경악스러운 순수함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어떤 얼룩도 묻지 않은 존재였다. 사회성이라는 이름의 물감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맑고 순수한 결정체. 그녀의 주변으로 한가득 퍼져나가는 지독히도 아름다운 보라색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보라색은 천천히, 그리고 물샐틈없이 밀려와 내 주위를 감쌌다. 포근한 이불이 온몸을 끌어안듯, 그 색은 점점 더 짙어지며 나를 집어삼켰다. 숨이 막히고, 시야는 흐릿해졌지만, 몸은 구름 위에 올라 있는 듯 아늑하고 편안했다. 이 감각을 놓치지 않고 뇌 깊숙이 새겼다.
낮 동안 캔버스 앞에서 방황하던 일을 떠올렸다. 단지 시각적으로만 보라색을 재현하려던 것이 패착이었다. 보다 더 다채로운 감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만들어내야 하는 결과물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감각할 때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감각의 문을 열어 그것을 받아들였다.
공허한 듯하면서도 숨을 틀어막을 만큼 공간을 채우는 위압감. 겨울밤 침대 속의 따스함과 보드라움이 등을 감싸는 한편, 손끝과 등줄기가 찌릿찌릿 저려왔다. 이슬비가 내린 뒤 이른 새벽의 산뜻한 풀냄새처럼 편안하면서도, 동시에 샛노란 과일들이 펑펑 터지는 오후의 축제처럼 시끄러운 향이 감각을 자극했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정적과 혼돈이 한데 얽힌 감각의 폭풍. 나는 보라색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던 나는, 조심스레 다시 눈을 떴다. 세상은 조금 밝아져 있었다. 건물 틈으로 보이던 캄캄한 하늘은 서서히 푸른 기를 머금고 있었다. 작은 살인자는 여전히 그녀의 예쁜 꽃밭에 앉아 있었다. 하얀 연기가 그녀의 머리 위로 퍼졌다. 흡연 기구를 손에 쥔 채 뚜껑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땀과 피가 선홍빛으로 엉켜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무언가를 세게 쥐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손을 내려다보니, 스케치북을 구겨질 만큼 움켜쥐고 있었다. 조심스레 스케치북을 펴니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번개처럼 예리한 선과, 무딘 돌처럼 묵직한 선의 섬세한 대치. 안개처럼 스민 명암과 불규칙하게 종이를 활보하는 보조선의 조화. 그것은 내가 좇던, 감각의 압축이었으며, 언제든 다시 그곳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지도 같았다.
스케치북을 조심스럽게 덮어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작은 살인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딸깍, 딸깍 소리를 내며 흡연 기구를 가볍게 흔들기도 하고, 검붉은 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보기도 했다. 몇 차례 그녀의 머리 위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온 뒤, 새벽 공기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원하는 걸 얻었니?”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 글쎄요.”
작은 살인자도 피식 웃었다. 흡연 기구를 다시 입에 물었다. 장미꽃을 무는 듯했다. 분수대 가운데 조각된 올빼미의 눈이 반짝 빛났지만, 이내 그녀가 내뿜는 연기에 가려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높이 뻗으며 몸을 길게 늘였다. 개운한 얼굴로 옷을 툭툭 털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작은 살인자는 풀어졌던 옷깃을 여미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나를 한번 돌아보았다.
“너 하기에 달렸지.”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골목 저편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남긴 발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캄캄하던 하늘은 이제 제법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꽃을 한가득 흩뿌린 듯한 정원 속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눈에 띄게 밝아진 거리 한복판에 홀로 선 나는 마치 벌거벗은 것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조금 비틀거렸다.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햇빛이 나를 찾아 골목을 구석구석 훑어보는 것만 같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저린 다리를 주먹으로 쿡쿡 눌러가며 도망치듯 걷기 시작했다. 빨리 집에 가서 붓을 들고 싶었다. 물감을 섞고 싶었다. 아니면 칼을 들고 조각이라도 하고 싶었다. 발걸음은 취객처럼 휘청거렸지만, 그럼에도 방향성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