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만족과 갈증

by 꿀꾀배기


물감이 묻은 붓을 팔레트에 대고 위로 그어 올린다. 상단에서 잠시 멈춘 뒤, 아래로 꺾어 돌리는 순간 투두둑, 물감 방울들이 튀어 오르며 자국을 남긴다. 위로 그은 길을 따라 다시 아래로 그어 내리며, 선을 완성...

아니, 붓은 그저 물감을 섞을 뿐이다. 여러 물감을 찍어대며 팔레트 위에서 몸을 빙빙 돌린다. 그 리드미컬한 동작 속에 규칙 같은 건 없다. 붓은 오묘하게 뒤섞여 반짝이는 물감을 눅진하게 머금고,



이상의 걸작에 마침표를 찍는다.






발작하듯 몸을 비틀며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멀어지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던 것만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놓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듯한 무언가였다. 노란 꽃밭을 거니는 듯 산뜻하고 따스한 향이 아련히 피어올라 사무치도록 그리웠다가, 뇌를 쿡 찌르는 강렬한 스파이스와 묵직한 장미의 향이 숨을 조였다. 내가 잡고자 했던 건 어느 것이었을까? 그러나 두 감각은 어느새 아득해지고, 정신이 들수록 코에는 불쾌한 기름 냄새만이 거칠게 밀려들었다. 익숙한 이 냄새... 유화 냄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은 거친 운동을 한 듯 쿵쾅거리며 요동쳤고, 그 박동 소리가 온 세상을 삼켜버릴 듯 울려 퍼졌다. 조심스레 고개를 왼 편으로 돌렸다.

“아...!”

외마디 탄식을 내뱉은 나는 다시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긴장이 순식간에 풀리며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찰나였음에도 그것은 내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로 그저 천장만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차갑도록 낯선, 그토록 재현해내고 싶었던 감각. 압도적인 보라색이 일렁이던 그날의 인상이,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 캔버스 위에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감각이 일회성의 번뜩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하고 역설적인 그 감각을 지금도 완벽하게 느끼고, 직접 재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나는 확신했다.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서로 다른 감각의 경계는 사라졌고, 그것들을 조화롭게 배치할 수 있었다. 한 감각 안에서도 극단을 섞고, 결을 비틀고, 속도를 변형해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마치 평면에 흩뿌려진 감각들이 입체 구조물로 떠올라, 정교하게 연결된 구슬처럼 하나의 궤적을 따라 회전하는 느낌이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지금과는 다른 주파수로 조율된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마냥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세상은 이젠 내게 우스꽝스러울 만큼 단순해 보였고, 그 안의 사람들의 욕구는 가엾을 정도로 원초적일 뿐이었다. 창밖을 걷는 저 남자의 모습은 생존과 배설만을 위해 움직이는, 프로그램된 생명체 같았다. 효율만을 추구해 지어진 회색의 거주 구역 건물들은 존재 자체로 비애였다. '아름답고자 하는 의지'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창을 닫았다. 이 세상은 너무 좁고, 너무 둔했다. 나는, 이미 다른 쪽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다.



한 차원 더 높은 곳에 서게 되니, 자연스럽고도 빠르게 거만함에 사로잡혔다. 아름답지 않은 것에는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방, 그 작은 세계는 '미'를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둔탁하고 무미건조한 것들뿐이었다. 감각의 여운은 아직 손끝에 남아있었지만, 계속 나와 함께해 줄지는 알 수 없었다. 이 감각이 꺼져버리면 어떻게 될까. 다시는 닿을 수 없다면...?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와 캔버스 앞에 섰다. 눈이 풀릴 때까지 그림을 응시하며, 그 감각을 온몸 가득 채워 넣었다. 육신이 이미 그것으로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미세한 감각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전부 팽팽하게 펼쳐 빈틈없이 밀어 넣었다. 풍선처럼 터져버리기 직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감각을 썩힐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돼. 신이 내게 하사한 이 기적의 열매를 외면하면,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절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조급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깨달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감각을 이해하고, 그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순간, T가 놓고 간 공모전 포스터를 떠올렸다. 그것은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포스터를 집어 들고 웹 주소를 확인했다. 디바이스를 열어 주소를 입력하자, 공모전 사이트로 연결되었다.

중앙에는 H의 얼굴이 큼직하게 떠있고, 그 아래에는 작품 응모 절차가 적혀 있었다. 사진을 사이트에 업로드하면, 주최 측이 직접 방문해 작품을 확인하고 운송한다는 설명이었다.

유화가 그려진 캔버스와, 드로잉이 담긴 스케치북을 촬영해 업로드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디바이스로 메일이 도착했다. 내일 오전 10시. 주최 측이 작품을 확인하러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메일을 확인한 후 떨리는 손으로 디바이스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숨이 벅차올라, 참지 못하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편의점으로 달려가 500ML 물통을 집었다. 디바이스에 찍힌 잔액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무인 계산기의 음성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는 선 자리에서 물통 안의 물을 전부 들이켰다.

시원함. 그리고 갈증의 해소.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잠시 후면 다시 갈증이 밀려올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 갈증을 쉽게 느끼고,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저급하고 일차원적인 만족감.



고작 이따위 걸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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