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쯤, '폭탄선언'을 했다. 그 폭탄선언은 바로 등교 거부. "엄마. 학교 가기 싫어요."였다.아이들의 성장이 빠른 만큼 사춘기도 빠르게 오는 걸까? 사춘기라고 하면 흔히 '반항'이라고하는 게 가장 먼저 떠 올랐고, 그 반항이 학교에 가기 싫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난 특별한 사춘기를 겪지 않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20대때 늦은'방황의 떼씀'이 찾아왔다. 졸업 후전공에 관련된 일을 3년 정도 하다가, 갑자기 공부를 해야겠다며 직장을 그만뒀는데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뜬금없이 유럽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고, 돌아와 하던 공부를 하던 중 다시 호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행 후 하던 공부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다시 새로운 직장에 취직을 했는데, 1년 반 만에 또 다시 직장을 그만두었던. 누가 봐도 방황의 시기 였음을 알 수 있는, 20대 때 "떼씀의 반항시기를 보낸 금쪽이" 그게 바로 나였다.꼭 유년시기에 겪지 않더라도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결국 언젠가는 사춘기를 모두 겪게되는 것이다.
그런데,이제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큰 아이가 학교라는 건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한다는 것에 엄마로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또 '농사'를 짓고 싶다고 얘기하는 큰 아이를 보면서 "아이고.."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갑자기 농사는 어디서 어떻게 태어난 생각인 거니.농사가 가장 어렵단다. 나연아. 흑흑'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를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아이들에게 "공부해라."라고 얘기한 적도 없다. 뭐가 문제였던 걸까. 아마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시기와 맞물려 학교에서 자유롭게 말하는 것 조차 조심스러워, 더 힘들어하고 답답해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학교 정문 옆, 학교주차장에서 아이와 울기도여러 번이었다. "나연아. 나연이가 힘들어하니까 엄마도 눈물 나." "교실에 들어가서 그냥 앉아있기만 하면 안 될까?" 아이는 학교, 교실 안에 들어가면 숨이 막힌다고 했다. 이대로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와의 홈스쿨링은 어떨까. 하고 네이버카페에 홈스쿨링 카페란 카페는 죄다 가입하여살펴보고, 월세라도 좋으니 더 깊은 시골 쪽으로 집도 알아보러 다녔다.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하지만 한참 뒤에야 알았다. 아이 마음의, 내면의 힘듦을 읽어주는 게 먼저였다는 걸.
그것 말고 다른 반항은 없었다. 엄마, 아빠에게 버릇없이 하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다른 건 모두 다 '정상'이었다. 나는 아이와 더 많이, 더 자주 소통하려고 애썼고, 매일 아이를 재우고 아이의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아이와 더 깊은 마음을 나누기 위해 글을 썼고, 그림을 그렸다.아이가 매일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알림장에.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아이의 알림장에 가끔 짧은 메모는 조금씩 했었지만, 학교에 가면 매일 확인하는 '알림장'에 내 마음을 전하면 아이가 '확인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첫째아이의 알림장에 전했던 엄마의 마음들 중, 일부분
알림장에는아이에게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적기도 하고, 아이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뮤지컬. 노래가사, 또 책에 나오는 예쁜 그림을 따라 그리고, 좋은 글 또는 시를 적기도 했으며, 아이와 있었던 작은 일상들을 함께 나누며, 학교가 마친 후 만나면 함께 공감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3학년때부터 6학년때까지알림장에 나의 마음을 전했고, 아이와 나는 눈만 마주쳐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척하면 착' 인 것처럼.
물론. 지금은 씩씩하게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 다행히.
올해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더라도 엄마와의 주고받는 메모는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엄마손은 약손"알림장의 효과 때문이었을까? 몇 년 후면 나타날 수도 있는 둘째의 사춘기를 '약하게' 지나가기 위해, 둘째가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내가한 것. 바로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