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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하의 별 Dec 17. 2020

엄마의 마음이 만든 영화와 같은 우연

행복을 찾아 떠나는 지구별 여행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나는 독일로 유학이 결정되어 마음이 바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공부하러 가는 것은 아니었고 나에게는 차선책이었지만 나의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는 한국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곳에서는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나에게는 없지 않아 있었다. 엄마  속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세상에 나온 나는 크면서도 계속 몸이 약했다. 그런 나를 엄마는 혼자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 불안감이 컸지만 나에게는 불안한 내색을 전혀 표현하지 않아서 나는 엄마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 유학 짐을 싸면서 무거운 3단 확장 이민 가방을 기운도 없는 딸이 혼자서 어떻게 가지고 갈지 걱정을 많이 하였다. 내가 먼저 독일에 가고 엄마가 배편으로 짐을 보내주면 되는데 그때는 미처 그 생각을 엄마도 나도 못했다. 짐을 간소화한다고 해도 3단 확장 이민 가방에 나의 물건들이 꽉 차게 담겼다. 기내용 가방과 3단 확장 이민 가방을 둘 다 끌고 갈 수 없었던 나는 기내용 가방을 사용하지 않고 3단 확장 이민 가방만 가지고 가기로 결정했다.



공항에 도착을 하고 출국 수속 준비로 나와 엄마는 분주하였다. 3단 확장 이민 가방을 먼저 수화물로 부쳤다. 그리고 나는 핸드백 하나만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엄마가 혼자 유학 가는 딸이 걱정스럽고 또 편하게 갔으면 해서 비행기 표를 비즈니스석으로 예매해 준 것을 비행기 탈 때 알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지 않게 가라는 엄마의 따뜻한 마음이 나에게 전해졌다.

나의 좌석은 비행기 창가 쪽이었고 내 옆에 좌석이 한 개 더 있었는데 그곳에 4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와서 앉았다.


"어디로 가세요? 나는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런던으로 갑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내려서 쾰른으로 가요"라고 내가 말했다.


그가 나에게 그곳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냐고 물었고 나는 우선 쾰른에 홈스테이를 예약했고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곳으로 알아본다고 말을 했다. 그에게 내가 공부할 곳을 자세히 말하기 싫어서 나는 그렇게 둘러댔다.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사람에 대해서 잘 판단이 없던 20대 초반의 나로서는 그의 친절함이 나는 왠지 불편하게 느꼈던 것 같다.



12시간의 비행이었지만 비즈니스석이라서 불편하지 않았다. 책도 고 뭔가를 긁적이면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다시 나에게 물어왔다.


"유학이면 짐이 꽤 될 텐데 프랑크푸르트에 누가 마중 나오기로 되어있나요?"


"아니요, 나 혼자서 쾰른까지 가요"


"학생 혼자서 가지고 갈만한 짐 크기인가요?"라고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게 질문을 하였다.


"3단 확장 이민 가방인데요"라고 내가 대답했다.



그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그 짐을 가지고 혼자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 다시 기차역까지 가방을 가지고 가서 기차를 타고 쾰른까지 갈 수 있겠냐며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충분히 나 혼자서 가능하다고 말을 했다.


잠시 그가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내게 "나는 프랑크 푸르트에서 런던으로 경유를 해서 갈 때 마침 시간이 3시간 정도 빕니다. 내가 학생을 쾰른으로 가는 기차를 태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어려 보였던 내가 초행길을 내 체격에 비해 아주 큰 가방을 끌고 그것도 늦은 밤 시간에 쾰른에 혼자 도착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여러 번 말을 했지만 그도 정말 괜찮다고 말을 해서 그의 도움을 감사히 받기로 했다.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을 했고 우리는 그곳에 내렸다. 그가 나의 수화물을 찾아서 나와 함께 기차를 타는 곳으로 이동을 함께 했다.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 도착해서 그는 나에게 가방 옆에 있으라고 하고 내 주변에 지나가는 아시아인들에게 일일이 한국 사람이냐고 영어로 물었다.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르고 내 짐 옆에 서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20대 중반 정도 되는 청년이 한국말로 그에게 대답을 했다.



"저 한국 사람 맞아요, 무슨 일 때문에 한국 사람을 찾으세요?"라고 청년이 물었다.


그는 그 청년에게 어디까지 가는지 목적지를 확인한 후 내 앞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여기 여학생이 혼자서 쾰른으로 가는데 혹시 이 기차를 함께 타고 가다가 쾰른에서 내려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청년은 "내 목적지가 쾰른보다 훨씬 더 가니까 가능합니다."라고 말을 했고


그래도 그 아저씨는 안심이 안되는지 다시 청년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해서 확인 후 본인의 명함을 나와 그에게 동시에 주면서 나를 부탁했다.



시간이 되어 기차가 왔고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독일에서 꼭 원하는 공부를 다 마치고 한국으로 행복하게 돌아가야 해요! 내가 출장이 빈번한 사람이니 혹시 가족에게 받아야 될 물건이 있으면 그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주세요, 내가 학생 가족에게 물건을 받아서 학생에게 전해 줄게요"라고 그가 말을 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그에게 인사를 하고 기차에 그 청년과 함께 올랐다.


기차에서 그 청년과 함께 쾰른으로 가게 돼서 매우 어색했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이고 아까 그가 청년의 신분도 확인한 거라서 나는 조금 안심을 하고 있었다. 청년은 나에게 독일에서 생활할 때 불편한 점과 또 좋은 점 그리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한참 설명을 했고 나는 그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기차 창문으로 보이는 밖은 칠흑처럼 깜깜했다. 내가 오고 싶었던 독일인데 풍경을 느낄 새도 없이 너무 정신없이 하루가 가는 느낌이 들었고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자꾸 옆에서 말을 해서 혼자만의 생각에 잠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낯선 곳을 혼자 가야 하는 불안감이 없었고 그래도 같은 한국 사람이라서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기차가 거의 쾰른 역에 가까워졌을 때 그가 나에게 홈스테이 주소와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냐고 물어서 나는 집주소는 모르고 유학원에서 알려준 전화번호만 있다고 대답을 했다. 그가 가방이 무거우니 쾰른에 함께 내려 나를 도와주고 본인은 다음 기차를 타도된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기차가 쾰른 역에 도착을 했고 문이 열렸다. 그가 내 가방을 들고 먼저 내렸고 나도 따라 내렸다. 주위는 불빛이 있었지만 그 불빛 사이로 어두운 느낌이 들었고 어떤 그림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조금 놀라 뒤를 돌아다보니 한 남자가 나를 보며 서 있었다. 그가 나에게 한국에서 유학원을 통해 홈스테이를 구한 여학생이 맞나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니 그가 본인이 왜 여기에 나왔지는 나에게 설명을 했다.




나에게 홈스테이를 소개해 준 그 유학원이 갑자기 문을 닫았다. 그 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유학생을 통해서 소문이 났다. 한국에서 어떤 여학생이 쾰른에 오기로 되어있는데 유학원이 문을 닫아서 쾰른 역으로 마중을 나갈 사람이 없다고 했다. 처음 오는 어린 여학생이 하숙집을 못 찾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내가 공부할 그곳 한인 유학생회에 퍼졌다고 했다. 그래서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던 한국인 유학생들 중 그날 시간이 되는 사람이 나를 마중 나와서 홈스테이 하는 집으로 나를 데려다 주기로 자기들끼리 결정을 하고 나를 마중 나왔던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나와 함께 들었던 내 동행자는 그를 의심하면서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고 그가 내 동행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동행자는 나에게 본인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말을 했고 나는 여기 쾰른까지 데려다줘서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나를 데리러 나온 그곳 유학생을 따라서 택시를 타고 홈스테이 하는 집으로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나의 엄마가 그렇게도 걱정을 했던 3단 확장 이민 가방을 공항에서부터 쾰른의 홈스테이 하는 데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끌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유난히도 몸이 약해서 나의 엄마는 그 가방을 나 혼자서 끌고 갈 수가 없을 거라고 너무 걱정을 하였다.
유학을 갔던 그때 나는 키가 163cm에 몸무게는 40kg가 안되었다. 자라면서 언제나 병치레하던 딸이라 나의 엄마는 걱정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런 딸이 엄마도 모르는 나라로 유학을 혼자 그것도 큰 가방을 끌고 간다고 생각하니 엄마는 엄마가 믿는 신께 간절히 기도를 했다고 한다. 내 아이가 가는 길에 도움을 주어서 제발 편안히 잘 도착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신은 엄마의 기도를 들어주어서 나에게는 엄마의 마음이 만든 영화와 같은 우연들이 일어난 것이다.



나를 비행기 안에서부터 프랑크푸르트 기차역까지 도와주었던 분

나를 프랑크 푸르트 기차역에서부터 쾰른 기차역까지 도와주었던 분

쾰른 기차역에서부터 내가 지낼 홈스테이 하는 곳까지 도와주었던 분

이 모든 사람들이 정말 우연히 나를 도와주었을까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어린 유학생을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주었던 그분들은 신이 보낸 천사가 아니었을까






epilogue

이 이야기는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었 1990년대 중반 나의 이야기입니다.











간이역

http://brunch.co.kr/@juwelrina/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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