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기에서 방금 꺼낸 빨래는 따끈했고 펄럭일 때마다 좋은 냄새가 났다. 빨래 개기는 매우 귀찮은 일이지만 이렇게 추운 날씨에는 손끝에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이 오히려 반갑다. 강아지처럼 뽀르르 거실과 안방 사이를 오가던 막내가 기어이 빨래를 개는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 제가 학교에 가기 싫은 이유 한 가지 알려드릴까요?”
“그 이유가 한 가지뿐이야?”
“아니요. 그건 아닌데 오늘 또 한 가지 이유가 생각나서 엄마한테 알려드리고 싶어요.”
“또? 그래. 그게 뭔데?”
아이는 잠시 눈을 깔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학교 변기는 우리 집 변기처럼 코팅이 안되어 있어요.”
“코팅?”
“네. 그래서 아주 더럽고 냄새가 나요. 학교는 왜 안 좋은 변기를 설치한 걸까요?”
이게 뭔 말일까 곰곰 생각하다 슬몃 웃음이 났다.
“우리 집 변기는 코팅이 되어있다는 거야? “
“그럼요! 우리 집 변기는 깨끗하잖아요. 물을 내리면 싸악 하고 씻겨 내려간다고요."
저만치 떨어져 막내와 내 대화를 듣던 둥이도 갑자기 흥미가 생겼는지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막내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있으면 벌써 달려들었을 텐데 어쩐지 둥이는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 변기는 말이야. 엄마가 자주 닦고 청소해서 깨끗한 거라는 생각은 못해봤어? “
“네?” 셋이 동시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3학년 짜리는 그렇다 쳐도 6학년짜리들 표정이 가관이었다. 다들 비슷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정말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엄마. 저는 우리 집 변기는 학교 변기랑 달라서 물 내리고 샤워기로 뿌리기만 해도 깨끗한 줄 알았어요. 진짜 엄마가 청소해서 그런 거예요?”
“그럼! 더러워지기 전에 청소해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거든.”
참나 깨끗해지는 게 변기뿐이랴? 떨어질세라 착착 채워 넣는 깨끗한 수건들, 정수기 옆에 늘 있는 머그컵, 화장실 휴지, 온갖 생필품들은 매일 내 손을 거쳐 자리를 잡는다. 세상이 좋아져 주부의 일이 편해졌다고 하지만 그릇이 제 발로 식기세척기 안에 걸어 들어갈 리 없고 세탁이 끝난 옷이 저절로 건조되지 않는다. 매주 몇 번씩 가족들 기호에 맞춰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일, 아침저녁으로 표시도 나지 않지만 청소기를 돌리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 어느 하나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때가 되면 가르쳐야지 하면서 조금씩 미루는 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이었다. 나도 어렸을 때 직접 배우지 않았지만 집안일을 어떻게 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어깨너머로 배웠고 소꿉놀이처럼 미숙하게나마 엄마 일을 돕기도 했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바빠도 너무 바쁘다. 학원에 숙제에 시간 되면 독서까지 학업에 치여산다. 여유 시간 나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아이들은 미디어 속 다른 세상을 산다. 약속된 시간이 끝나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집은 늘 정돈되어 있다. 그러니 아이들은 집안일이 기껏해야 빨래 개기, 설거지, 청소기 돌리는 게 다인줄 아는 거다. 한 번도 엄마가 화장실 청소 하는 것을 보지 못한 아이들. 이게 우리 집 현실이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겨울방학이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 발로 서서 제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운다는 것이 공부만 가르친다는 것은 아니다. 깨끗한 환경 뒤 보이지 않는 수고와 노고를 가르쳐야겠다. 그리고 감사도.
저절로 깨끗해지는 변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