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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러 간다

by 주원

쌍둥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탁구를 배웠다. 아파트에서 무료로 가르쳐주는 탁구 수업이라 그런지 회원들 모두 연세가 지긋하셨다. 위층 언니를 따라갔는데 언니가 금방 적응한데 비해 나는 조금 힘이 들었다. 막내라 가면 문 열고 환기시키는 건 기본이고 눈치껏 커피도 타드려야 했다. 돌아가면서 밥도 싸가야 했고 신입턱이라고 떡도 해야 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이모뻘 되시는 분들이 자꾸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신 것이 제일 난감했다. (운동하며 만난 사이는 다 언니동생이라고 한다.)


3개월은 공만 줍다 끝났고 4개월 차 즈음 되었을 때 공을 맞히기 시작했다. 백지라고 해야 할지 백치라고 해야 할지 공 앞에 한없이 무력한 나를 강사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땀을 뻘뻘 흘리며 더 열심히 했다. 이제 공좀 치려나? 백핸드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허리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말썽이었던 허리가 또 문제였다. 그대로 몸져누워 운동은 다 잊고 지냈다.


8년이나 지나서 다시 탁구장을 기웃거린 건 쌍둥이들 때문이었다. 엄마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아이들인데 운동만 시키려고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켰다. 운동은 다 싫다는 아이들에게 탁구를 시켜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실내 운동이고 여러 사람 앞에 실력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운동이라는 설득에 슬슬 마음이 동하는 것 같았다. 너희가 한다고만 하면 엄마도 같이 배우겠다는 말에 아이들은 바로 넘어왔다. (쌍둥이는 엄마 바라기였다.)


일 년 반을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같이 레슨을 받았다. 기대를 많이 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다. 6개월 즈음되었을 때 영 아니다 싶어 남편에게 애들이 너무 못친다고 말했다. 남편은 우리 아이들 운동신경 없는 거 알고 있지 않냐며 돈 버리는 셈 치고 더 시켜보자고 했다. 지금 애매하게 그만두면 돈이고 시간이고 다 버리는 거라고 말이다. 나도 동의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나 아이들 실력을 본 남편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듯했다. 조용히 다가와 내게 귓속말로 당장 때려치우라고 했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잠만 자고 일어나도 키는 크는데 실력은 왜 늘지를 않는가.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앞에 세워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일 년 넘게 너희를 태우고 다니며 이렇게 레슨을 받는 동안 하나도 늘지 않았다는 데에 실망했다. 어렵고 힘들어서 못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지만 이건 아니다. 노력하기가 그렇게 싫었으면 중간에라도 엄마한테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우리들의 귀중한 시간도 돈도 그렇게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들은 당장 그만두고 남은 레슨은 내가 받기로 했다. 탁구는 파트너 운동인데 혼자 하려니 재미도 없고 실력도 늘지 않았다. 돈이 아까워 겨우겨우 레슨을 받으러 다니던 어느 날, 탁구장에서 대학교 선배와 선배의 동료를 만났다. 남자라고는 몇 되지 않는 국문과 남자 선배였고, 그중 같은 고전분과라 답사도 함께 다녀온 나름 친했던 선배였다. 옛 선배를 만난 것도 기쁜데 탁구 친구라니 기쁨 두 배가 아닐 수 없었다.

같이 칠 사람이 생기자 탁구가 엄청나게 재미있어졌다. 한 번 가면 몇 시간씩 땀을 쏟으며 쳤다. 한두어 달 랠리를 주고받다가 게임도 시작했다. 내가 워낙 형편없는 실력이라 선배는 11점 내기 중에 6점을 잡아줬다. 그러고도 매일 졌다. 나는 아직 서브도 넣을 줄 모르는 생초보였다. 화, 목 레슨 받는 날만 가서 만나다가 어느 날부터는 시간이 날 때마다 모이기 시작했다. 많이 만나는 날은 주에 4번 까지도 만났다. 실력이 늘기 시작했다.


6점을 잡아주던 선배가 지는 횟수가 늘자 차근차근 점수차를 낮추었다. 처음에는 무난하게 공을 주다가 내가 점수를 내 본인이 질 것 같으면 험한 공을 보냈다. 못 받을 걸 알면서 요리조리 공을 보내 약을 올렸다. 한참 약을 올리다가 미안해지면 다시 좋은 공을 주기도 했다. 속으로는 '저 놈의 손모가지를 내가 가만두나 봐라!'싶었지만 웃으며 견뎠다.


이제는 3점을 받고 친다. 가끔 내기도 한다. 여전히 약 오르는 날이 많지만 괜찮다. 좋은 공만 받으면 실력이 늘 리가 없다. 약 올리는 공이 내게는 약이 될 것을 안다.


나는 오늘도 지러 간다.


(내년에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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