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 관광의 명과 암
넘지 말아야 할 선.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돈지간은 멀어야 좋다고 말이다. 나도 공감하던 바였으므로 결혼 후 십 년이 넘도록 시댁과 친정이 맞닿을 인연은 거의 없었다.
여행이 문제였다. 우리가 첫 해외여행을 계획하기도 훨씬 전부터 시어머니는 해외에 함께 가고 싶으시다는 뜻을 비치셨다.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4~5년 어머님과 여행을 함께 다녔다. 강원도에 한 번 가고 제주도를 내리 세 번 가자 어머님이 제주도는 그만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을 신호로 우리 다섯 식구의 여행은 금방 자리를 잡았다. 입에 담지 않아도 우리만의 여행이 자유롭고 편안하다는 것을 가족 모두 알았다.
한참을 그렇게 지냈는데 어쩌다 해외여행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어머님은 우리보다 가고 싶은 데가 많으셨고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다섯 식구의 여행에 익숙해졌던 터라 걱정이 앞섰지만 그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어머님을 모시고 첫 해외여행으로 다낭에 다녀왔다. 휴양과 관광이 어우러진 곳이고 가격도 적당하여 좋은 컨디션의 숙소에서 3박을 편히 보냈다. 어머님은 여행을 마지차 마자 다음에 또 가자고 하셨다.
순번을 따지니 이제 친정 차례였다. 암투병 이후 식이 장애를 얻은 아빠는 식사를 전혀 못하셨다. 환자용 유동식 한 포를 드시는 것도 버거운 아빠를 모시고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엄마는 몇 년째 아빠 옆에 벌서는 것처럼 노심초사하셨다. 고민 끝에 엄마라도 모시고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한테 말씀드리니 아빠도 동의하셨다. 그런데 뜻밖에 어머님이 나서셨다. 사돈이랑 여행을 같이 가고 싶다는 거다. 처음에는 완곡히 거절했다. 어머님은 직설적이신 분이고 우리 엄마는 싫어도 내색을 안 하시는 분이니 여행 동안 엄마가 불편하실 것 같았다. 올해에 엄마를 모시고 다녀오고 한 2~3년 후에 어머님을 다시 모시고 가자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남편은 생각이 달랐다. 한 해가 다르게 기력이 쇠하는 어머님이 언제까지 여행을 다니시겠냐는 거였다. 장모님도 마찬가지라고. 어차피 모시고 갈 거면 두 분 같이 모시고 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
친정에 가서 우리 생각을 전해드렸다. 원래는 엄마만 모시고 가려고 한 여행에 어머님이 함께 하고자 하시는데 엄마 의견은 어떠시냐고. 엄마는 선뜻 좋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 괌 여행이 시작되었다.
공항에서부터 단단히 다짐을 받았다. 두 분이 이제 단짝이시니 손 꼭 잡고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인터넷에 떠도는 어르신들 여행 금지어 '이게 얼마냐? 물이 제일 맛있다. 김치 없냐? 얼마나 더 가야 되나?' 하는 등등의 말은 하시면 안 된다. 절대절대 싸우지 않고 돌아오는 게 이 여행의 목표다 하고 말이다. 어머님들은 아이처럼 깔깔대시며 동의하셨다. 공항 보안수색대에서 어머님이 몰래 챙겨 오신 고추장 뺏긴 것만 빼면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두 분은 정말로 유치원생처럼 손을 꼭 붙들고 다니셨다. 차를 세우고 자 여기에서 사진 찍으세요. 하고 말씀드리면 다정하게 서로 사진을 찍어주셨다. 워낙 사진 찍는 거 좋아하시는 두 분은 맞춤 단짝이었다.
문제는 밥이었다. 풀이랑 고추장, 된장 없이 하루도 못 사는 게 우리 K어머님 특징 아니던가! 어머님은 특히 입맛이 까다로우시고 당뇨도 있으시다. 첫날 저녁 바비큐부터 어머님은 입맛에 안 맞으시다고 컵라면을 드셨다. 다행히 조식에는 밥과 김치가 나왔다. 점심은 적당히 때웠고 저녁은 한식으로 정했다. 괌까지 와서 오징어 볶음에 된장이라니 나와 남편은 애매한 맛의 한식을 맛있게 넘기지는 못했다. 그다음 날도 뭘 드시고 싶으시냐는 물음에 두 분은 입을 꾹 다무셨다. 필시 한식이 드시고 싶은 거였다. 우리는 별수 없이 한식당을 검색해 차를 몰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군말 없이 따랐다.
어머님은 꽃게된장찌개, 엄마는 김치찌개, 우리는 고등어구이와 오징어볶음을 시켰다. 식사를 시작하는데 어머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식사하러 오시는 동안 뭐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되짚어가면서 기억을 되새기는 동안 나도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혹시 내가 친정 엄마만 챙긴 것은 아닐까? 엄마가 어머님께 언짢아하실 만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까? 들척지근한 오징어볶음을 먹는 듯 마는 듯 겨우 삼켰다. 여행 내내 어머님과 장모님 사이에서 눈치 보느라 바빴던 남편도 레이더가 작동한 것 같았다. 드실만하냐며 어머님께 말을 걸었다. 어머님 안색을 살피며 어머님 된장국을 한 입 떠먹은 남편이 갑자기 구역질을 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드셨냐고 했다. 그 말에 나와 아이들 모두 된장국을 한입씩 떠먹어보았고 모두 우웩 거렸다. 된장국에서 나프탈렌 맛이 나는 거 같았다. 알고 보니 어머님이 도저히 입맛에 맞지 않는데 우리들 실망할까봐 꾸역꾸역 드시느라 얼굴빛이 어두워지신 거였다. 그제야 친정 엄마도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이거 시킨 죄로 억지로 먹느라 혼났다." 김치찌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고 가는 배려 속에도 불편함은 스멀스멀 싹을 내었다. 예민하고 조심성이 많은 우리 부부에게 마냥 편하고 여유로운 여행은 아니었다. 돌아오는 괌 공항에서 남편은 이제 좀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당분간은 어머님들 모시고 여행은 가지 말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하는 남편에게 나도 절반은 동의했다.
괌 공항에서 수속이 조금 지연되었지만 우리는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어머님들 노래를 부르시던 제대로 된 한식을 사드릴 수 있었다. 뚝배기 바닥까지 긁어드시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 손에는 한식 한 손에는 해외여행, 양손에 든 것을 한 번에 입에 넣으려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깜깜한 밤 공항을 나서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에미 아비야 여행 데리고 가줘서 고맙다. 덕분에 즐거웠다."
흐뭇함과 뿌듯함이 너울진 우리 부부의 얼굴 뒤로 어머님이 한 마디 더 하셨다.
"다음에는 홍콩 가자."
아무래도 끝이 아니라 시작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