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는 규칙을 잘 지키는 편이었는데 사춘기에 접어들자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최근 정해진 시간 외에 몰래 휴대폰을 사용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도 사춘기를 겪어보았지만, 딱 숙제하려던 시점에 숙제하라는 다그침을 들으면 하려던 숙제도 집어던지는 게 사춘기의 본분 아니던가. 기회를 봐서 훈육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주말에 아이들 방에 갔던 남편이 불쑥 현장을 잡아왔다. 사색이 된 아이가 헐레벌떡 제 아빠를 쫓아 나오며 연신 잘못했다 말했다. 휴대폰의 유혹은 차마 참기 힘들었으리라. 훈육 담당인 내가 따끔하게 혼내야 하나 잘 타일러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에 남편은 타이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정해진 시간을 다 쓰고 부족하면 엄마나 아빠에게 허락 맡아. 추가 시간 줄게."
아이는 바로 순한 눈을 내리 깔고 "네."하고 대답했다.
여기까지였으면 좋았을 텐데... 남편이 둘째까지 불러서 말했다. 필요하면 언제든 추가 시간을 주겠다.(이건 아니지!) 오늘은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하니 특별히 추가 시간을 1시간 더 주겠다고 말이다. 아이들에게 아량을 베풀고 정을 나누고픈 아빠의 마음은 알겠지만 다분히 기분파적인 처사였다. 혼날 줄만 알았던 첫째와 둘째는 연신 '고맙습니다'를 외치며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밖으로 뛰어 나갔다.
훈육을 한 건지 만 건지 찝찝한 기분이 들려는 찰나 막내가 방에서 뛰어나오며 말했다.
"엄마. 언니들 잘못해서 혼나는 상황 아니었어요? 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왜 상을 받는 거예요?"
막내의 말이 맞았다. 내 교육관에도 이 상황은 옳지 않았다. 대체 누가 어른인가? 열 살 짜리도 아는 것을 왜 아빠는 모르는 건가?
막내의 이의제기를 들은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으응. 아빠가 잘 못했네."하고 넘겼다. 본질에 접근하기보다 이 상황을 그저 넘기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우리 막내는 이 사태를 그냥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는 게 며칠 뒤 밝혀졌다.
이틀 뒤 주말에 예산으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기분 좋게 출발해서 예산시장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후식으로 예산샌드와 예당 타르트를 먹으며 예당호 출렁다리에 도착했을 때는 온 식구들이 달콤함에 취했다. 그런데 출렁다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막내가 언니 휴대폰 부정사용 사건을 입에 올렸다. 언니들이 몰래 휴대폰을 사용한 것은 매우 부당하다는 취지의 호소문이었다. 막내의 감정은 이해가 되었지만 문제는 태도였다. 굳이 여행 와서 언니들의 잘못을 끄집어내며 혼내주라 훈수를 두는 폼이 적절치 않아 보였다. 네 마음은 알겠으나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엄마도 다 생각이 있다고 했다. 막내는 당장 언니를 혼내지 않는데 발끈해서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떴다. 막내의 버릇없는 태도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이 셋을 출렁다리 한가운데에 세워두고 혼을 냈다.(다리 중앙에 전망대가 있고 공간이 넉넉해서 다른 관람객에 피해가 가지 않았다.) 언니로서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몰래 휴대폰을 사용하다니 언니로서의 위엄이 있냐 없냐. 너는 막내가 어디 엄마한테 이래라저래라 훈수 질이냐 뭐 등등의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했지만 화가 풀리지 않았다. 기분 좋았던 여행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흐려졌다. 5분 전처럼 손을 잡고 재잘거리며 걷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여기 있을 테니 너희는 아빠랑 출렁다리 반대편까지 돌아보고 오라고 했다. 남편은 애절한 눈빛으로 보내며 같이 가자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모른 척했다.
나를 남겨 두고 한 열 걸음쯤 갔으려나? 남편에게 메시지가 왔다.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주고 싶다는 거였다. '아이스크림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잘못해서 혼났는데 무슨 아이스크림이냐 절대 사주지 마라고 힘주어 답장을 썼다. '절대'라는 부사도 덧붙였다.
아이들이 다리 건너편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숨을 고르니 호수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때렸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다리 건너편 풍경이 궁금해졌다. 따라갈까 하다 보내놓고 쫓아가는 그림은 아니다 싶어 말았다. 고개를 드니 마침 내가 멈춰 선 곳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계단 끝에는 전망대가 있었다. 혼자 전망대를 올랐다. 오늘따라 긴바지를 입어 그런지 바지가 무겁게 느껴졌다. 전망대에 오르니 저 멀리 남편과 아이들이 개미처럼 보였다. 높아지니 내 작은 마음이 보이고 멀어지니 애틋함이 밀려왔다.
남편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스크림은 사주지 말고 다리 중간에 있는 전망대는 꼭 올라갔다 오라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와 왔던 길로 되돌아온 다음 출렁다리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다섯 식구 함께 다닐 땐 세상 무서울 게 없는데 혼자 있으니 허전했다. 무리를 지어 걸어와 사진을 찍는 다른 가족들 등쌀에 엉덩이를 움찔 움직여 자리도 내어주었다. 가족들이 돌아오면 못 이기는 척 화를 풀어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어라? 막내의 손에 아이스크림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기어이 사 먹었다고?
잦아들었던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몸을 휙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엄마한테 혼나고 가서 자기들끼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니 괘씸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차에 타자마자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너희 그렇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어?"
애들 셋의 눈동자가 모두 남편 뒤통수로 쏠렸다. 남편은 눈을 껌벅이며 차창을 내렸다.
"엄마. 그게 아니라요."하고 말하는 첫째와 둘째 눈에 눈물이 고였다. 대단히 억울한 모양이었다.
"아빠가 자꾸 아이스크림 먹자고 하셨는데 제가 안된다고 분명히 아빠한테 말씀드렸거든요. 우리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화난 엄마를 두고 아이스크림 사 먹고 온 사람이 되는 거라고요. 그런데 아빠가 자꾸 괜찮다고 엄마도 하나 사다 드리면 된다고 하셨어요."
'네 놈이 먹고 싶었구나!'
애들 앞에서 남편을 잡을 수는 없어 실소를 터뜨렸는데, 남편이 갑자기 엄마 화 풀렸다며 요란을 떨었다. 분위기를 풀려고 노려하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내 감정을 밀고 나갈 수는 없었다. 여행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을 풀어보려 애쓰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전망대는 올라갔다 왔어?"
"엄마. 전망대라뇨? 그게 뭐예요?"
보라는 전망대는 안 보고 먹지 말라는 아이스크림만 먹고 온 남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