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가면 아이들이 몰리는 서가가 있다. 주로 만화책이나 학습만화 코너이다. 그중 단연코 인기가 높은 책은 유명 학습만화 시리즈 중 하나인 <사춘기와 성>이다. 얼마나 많이 손을 탔는지 책이 아주 너덜너덜하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도서관에서 무심하게 책 한 권을 골라와 자리에 앉았다. 누구나 아는 학습만화 시리즈였기에 곁눈질로 내용만 잠깐 확인만 했는데 바로 그 책이었다. 성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이고 그림이 너무 적나라해서 1학년 아이가 보기에는 과했다. 아이에게 이 책은 너에게 아직 이르니 좀 더 크면 보자고 타일러 책을 받았다. 아이는 바로 수긍하고 같은 시리즈의 다른 만화를 골라왔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보니 그런 일이 왕왕 있었다. 고학년 아이들은 서가에 쭈그려 앉아 <사춘기와 성>을 읽다가 어른이 지나가면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주위를 의식하지 못하는 더 어린아이들은 넋 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호기심 넘치는 아이들에게 그 책만큼 시선을 사로잡는 책도 별로 없을 거다.
둥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치아 교정을 알아보러 조금 먼 곳의 치과에 간 적이 있었다. 내가 진료 접수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익숙하게 대기실 서가 쪽으로 향했다. 어디를 데려가도 곧 자리를 잡고 책을 읽는 아이들이라 열 발자국 이상 떨어져도 까만 머리통 둘 만 확인하면 되었다. 엑스레이 찍을 차례가 되어 아이들 쪽으로 갔는데 아이 손에 익숙한 책이 들려있었다. <사춘기와 성>이었다. 1년 전 순순히 내려놓았던 아이는 속으로 언젠간 저 책을 읽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던 모양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정확히 그 책을 골라 무서운 속도로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미소를 지으며 타일렀다.
"엄마가 아직은 이르다고 조금 더 크면 보라고 했잖아. 책 덮고 엑스레이 찍으러 가자. 때가 되면 엄마가 책 사줄게."
이쯤 되자 <사춘기와 성>은 우리 집 금서가 되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책 읽는 수준이 높아졌다. 마침 새로 나왔다는 과학 관련 전집이 있어 집에 들였다. 아이들 학교 간 사이에 책이 도착했다. 상자를 열어 한 권 한 권 훑어보는데 어라 여기에도 금서가 떡하니 있는 거다. 이번에는 제목이 <성과 사춘기>라는 것만 달랐다. 얼른 그 책을 안방 깊고 높은 곳에 숨겼다. 때가 되면 봉인해제하리라.
지난주에 6학년 둘째가 초경을 했다. 때가 되어 대비를 했었고 마침 집에서 일어난 일이라 둘 다 침착했다. 아이에게 패드 사용법과 정리하고 버리는 방법을 다시 한번 알려주었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는데 아이는 의외로 무덤덤했다. 예상했던 일이라 그런지 아무렇지 않아 했고 더 설명하려고 하니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미 다 알고 있어 불필요하다는 건지 내밀한 영역이 자꾸 언급돼서 불편하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밤 고민이 시작되었다. 때가 되면 보여주겠다고 말했던 그 '때'가 닥쳤기 때문이었다. 쌍둥이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초경을 하면 금서를 봉인해제 하겠노라고 나 혼자 다짐했었다.
다음 날 아이가 학교에 가자마자 깊숙한 곳에 있던 책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목차부터 차례로 읽어나갔다. 아이가 컸으니 당연히 꺼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먼저 경험한 친구에게 고민상담을 했다. 친구는 명쾌한 답을 주었다. 자기는 불편한 내용을 한 장 찢어내고 주었다고 했다. 이런 기가 막힌 방법이! 그래서 다시 살펴보니 나는 찢고 싶은 부분이 한두 장이 아니었다. 나는 이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지독한 검열관이었던 모양이다. 어디를 찢고 어디를 남겨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아이들이 도착하는 바람에 후다닥 원래 봉인돼 있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어쩌면 좋을까? 이걸 다 알아야 할까? 어디까지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아니 사실은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거 아닐까? 가만 생각해 보니 나도 제법 일찍 눈을 떴던 것 같다. 나는 오빠가 있다. 오빠는 본인의 호기심 충족을 위해 다양한 책을 빌려왔고 책을 아무 데나 던져두었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무협지를 섭렵했다. (역시 최고는 김용의 영웅문이다.) 성인만화도 어깨너머로 탐독했다. 이 분야에 대해서 빠삭하다고 생각해서 중학교 때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 가소롭기까지 했다. 그러다 정작 고등학교 때 키스가 입술만 부딪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성교육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거다. 성교육 대상자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모른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했다. 양호 선생님이 교실로 오셔서 동영상 한 두 번 틀어주셨던 게 전부였다. 집에서 부모님이 설명해 주시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알아서 독학(?)하는 영역이었고 나도 그랬다. 그래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책만 던져주자니 필요한 내용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두 번째 이유는 가르치기가 너무 껄끄럽다는 거다. 성교육을 터부시 했던 문화가 내 안에도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날카롭게 질문하면 내가 잘 대답해 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는 막연히 학교에서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에 학교에서 이런 메시지가 왔다.
'오늘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아이들 발달 과정이 다 달라 전체를 대상으로 설명해 주기 어려우니 가정에서 지도 부탁드립니다.'
맙소사.
다행히 최근에는 유명 성교육 강사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검색창에 검색만 해도 온라인 오프라인 강의들이 꽤 많다. 오프라인으로 아이들 성교육을 받게 한 지인이 가능하면 교육을 함께 받으라고 조언해 줬다. 교육을 받고 아이들과 대화를 해봐야 아이들이 얼마큼 아는지 부족한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좋은 방법 같아 참고하려고 한다.
어렵거나 불편한 지식 말고 엄마가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내용은 있다. 내 몸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그렇고 몸을 위생적으로 관리하는 방법 같은 것 말이다.
사실 내게는 제일 알려주기 어려운 내용이 성관계의 목적이 '생식'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성폭력 범죄가 왜 일어나는 가에 대한 설명을 해 준 적이 있다. '쾌락'을 위해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가하는 폭력적인 행동이라고 알려주었다. 충분한 설명이 아닌 것 같아서 곧 질문을 할 것 같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이들은 '쾌락'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이들도 곤란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기본 욕구인 '성'을 그동안 너무 죄악시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와 연관된 단어 말고 건강한 단어와 문장으로 설명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성숙된 관계의 기쁨을 알려주고 싶다.
고민이 깊어진다. 프로주부에게도 성교육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