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독에 묻힌 여행
'여행'이란 단어는 천년만년 설레기만 할 줄 알았습니다. 공항에 들어서기만 해도 들뜨고, 향수향이 진하게 풍기는 휘황찬란한 면세점 구경도 재밌고, 기내식은 뭐가 나올까? 어떤 걸 선택해 먹을까? 궁리만으로도 즐거운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풍기는 이국적인 향마저도 신기하고, 광고전광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두고, 길을 걸으면서도 몸을 360도로 돌려가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세상 신기한 거 재미난 거 천지, 세상은 넓고 경험할 건 무한히 차고 넘치니 다 가보고 경험해 보겠다고 당찬 마음을 키우던 제가 과거에 있었습니다. 분명.
'여독'이란 그림자가 점점 커지더니 '여행'이란 본체를 많이 잡아먹어버렸습니다. 여행을 질리도록 충분히 해서는 아니고, 체력, 호기심, 여행에 쏠렸던 흥미가 줄어든 자리에 낭만과 무모함 보다는 냉정히 현실을 직시하는 제3의 눈이 커져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두 눈 반짝이며 무거운 짐을 지고도 힘든 줄 모르고 씩씩하게 세상을 탐험하던 제가 어딘가에는 남아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