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과 퇴폐의 동굴인 베누스 부르크를 경험한 인간은 '지팡이에서 꽃이 피고 잎이 돋아나야'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탄호이저' 오페라 대목에서 생각이 정지했다. 전혀 알 수도 알아볼 수도 없는 시간 안에서 펼쳐질 인생이 흥미롭지만 오늘이 내일이라는 생소함을 어느 정도는 파악을 할 수 있으니 늘 지금이 문제이다. 본성에 대한 가언 명령을 말하고 싶었던 녀석이 '칸트'를 인용해 대화를 시도하니 당혹스럽다. 나는 그 녀석의 이면에서 어둠을 보았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음에 내몰기도 하는 언어유희에서 박차고 나올 타이밍을 기다리다 보니 엉덩이에서 한기가 느껴진다. 불편한 진실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허기를 느끼지 않으면 인간이 '신선'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상상이 '용서'만큼 어려울까? 그녀가 꽃이 피는 지팡이를 들고 저만치에서 달려오는 것 같은데--- 젠장할 용서가 아닌 허기를 면할 양식이구나! 나의 신선놀음은 여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