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필
사진은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중학교 3학년 2학기 내내, 내 교복 상의 안주머니에는 항상 담배 한 갑이 들어 있었다. 필립 모리스였다.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필립 모리스를 피우는 장면을 보고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필립 모리스 한 갑을 사서 피우셨다는 피천득 선생의 수필을 본 이후였다.
정말 피울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비닐도 뜯지 않은 담배를 그냥 가지고만 다녔다. 하지만 내 심장 부근에 잉그리드 버그만이라는 배우가 피웠고, 피천득 선생이 지니신 담배와 똑같은 담배가 한 갑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로 내가 영화배우나 작가와 교감을 나누는 유명 인사라도 된 듯 혼자 으쓱했던 것이다.
점심을 먹고나서 이어폰을 귀에 꼽고 전람회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께서 급히 제출해야 하는 글이 있다며 저녁을 먹기 전까지 한 편 써 내라고 하셨다. 내게 도깨비방망이라도 있어서, 뚝딱하면 글이 나오는 줄 아는 사람이, 생각해 보니 이미 그 때부터도 있었다.
사진: Unsplash의Aaron Burden
글을 생각하고 쓰는 것도 큰일이지만, 그걸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쓰는 것이 더 큰 걱정거리였다. 그 때는 지금보다 더 악필이었다. 어찌어찌 글은 썼으나 아무래도 누군가가 그걸 알아볼 수 있게 다시 써 줘야 할 것 같았다.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에게 처음으로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방과후에 시간 있어?"
황당하고 어이없는 눈빛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던 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가 개발괴발 갈겨 쓴 글씨를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옮겨 써 주었다. 오후의 노란 햇살이 복도 쪽의 작은 창으로 들어와 아이의 흰 뺨은 더욱 빛났다. 힘들게 한 게 미안해서, 또 아이가 너무 예뻐서, 교실 안이 너무 조용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나중에 멋있는 남자로 성장해서 그 아이 앞에서 멋있게 필립 모리스를 한 대 피워보고 싶은 새로운 꿈이 생겼다(물론 이제는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멋있지도 않을 뿐더러 큰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비흡연자이다).
아이는 잠깐 인상을 쓰며 오른팔을 두어 번 돌리고는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여자아이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소리도 못 했다. 회색 교복에 빨간 가방을 메고 복도로 사라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담배의 비닐을 뜯어 한 개비를 꺼냈다.
담임선생님께 담배를 걸린 것은 며칠 후의 일이었다.
선생님은 이걸 정말 피우려고 샀는지를 물으셨고, 나는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내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시던 선생님께서 물어보셨다.
"이거, 다시 줄까?"
"아니요."
"그래. 이건 좀 그래."
어쨌든 내 말을 다 믿어 주셨는지 꾸중이나 주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나의 첫사랑과 나의 첫 담배 한 갑의 기억에 마침표가 찍혔다.
얼마전 그 때 생각이 나 편의점을 찾았다.
"필립 모리스 한 갑 주세요!"
"필립 모리스 뭐요?"
"아... 담배요. 필립 모리스."
발음이 엉망이라 혹시 편의점 직원분이 못 들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필.립. 모.리.스.를 한 글자씩 발음하는 내게, 편의점 직원분은 계산대 뒤편 담배 진열대의 한 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는 게 다 필립 모리스예요. 이 중에 뭘 드릴까요?"
"아... 그럼 말보로 하나 주세요."
"말보로는 이 줄이 다 말보로예요."
"그럼 잠깐 구경 좀 해도 될까요?"
필립 모리스 중 가장 많이 나가는 걸 한 갑 샀다. 담배를 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계산 후 담배를 안주머니에 넣는데, 직원이 물었다.
"라이터는 있으신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는 이 담배를 꺼내 물어도 선생님께 혼이 난다거나 할 일은 없는 나이가 되었다. 담배는 누구에게 빼앗기는 일 없이 주머니에 오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서글퍼졌다. 얼마 전 소문으로나마 들었던 그 아이의 소식. 기억 속 그 날로 돌아가 그 아이를 마주한다면, 아주 큰 소리로 말하고 싶다. 원고지에 글씨를 옮겨 써줘서 너무 고마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