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이하는 3월 오랜만에 남편과 따뜻한 한국 영화 한 편 보고 왔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상위 1%의 영재들이 모인 자사고를 배경으로 한다. 게다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수학을 소재로 하고 있으니 별로 반갑지 않은 구성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르는 지극히 한국적인 드라마로 그 내용은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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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 특히 학부모들이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인 교육에 대해 반성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대부분의 학부모는 자신의 자식이 1%의 영재가 되길 바랄 것이고, 역시 수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며,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는 데 더 열을 올릴 것이다. 젊은 시절 잠시 학원에서 수학 강사로 일했던 남편과 현재 학원에서 성적과는 큰 상관이 없는 논술을 가르치는 나는 각자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며 영화를 감상했다. 그리고 우리는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두 아들을 생각하며 함께 웃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수학에 관한 얘기만이 아니다. 북한에서 자유로운 학문을 위해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은 낮은 수학 점수로 고민하며 수학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온 고등학생 한지우(김동휘)에게 인생을 가르친다. 잘못된 문제에서 올바른 답이 나올 수 없다며 정답보다 중요한 건 답을 찾는 과정이라는 그의 말은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한 사람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로 들렸다. 삶의 목표를 잘못 정한다면 그 과정이 아름다울 수 없고 결과 또한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수포자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쓰인다. 우리 두 아들도 수포자로 큰아들은 수학 점수 없는 미술을 했고, 작은아들은 수학 공부를 하지 않고 체육학과를 준비하고 있다. 그와는 다르게 나와 남편은 학창 시절 수학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학원 한 번 가보지 못한 우리가 수학을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도 성적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중학교 때 호기심으로 언니들이 쓰던 수학 정석까지 풀어보기도 했다. 빨리 풀 필요가 없었으니 수학을 즐길 수 있었다. 그 덕분으로 중학교 2학년 말에 시골에서 전학온 날 수학 테스트에서 다른 아이들이 놀랄 정도로 좋은 점수를 받기도 했었다. 지금은 가끔 구구단도 헷갈리는 수준이 되었지만 말이다.
영화 속 수학자는 수학을 잘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머리도 노력도 아닌 용기라고 했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이거 참 어렵군, 내일 다시 한 번 풀어봐야겠어'라며 대수롭지 않게 또 시도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단다. 이건 수학뿐만이 아니라 삶에서 요구되는 태도이기도 하다. 살아가며 부딪히게 될 어려운 문제들에 좌절하지 않으려면 좋은 머리만 믿어서도 안되고, 묵묵히 노력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의연하게 다시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우리 어른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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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학생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 기술은 빠르게, 많이 가르칠 수 있지만 기술만 습득한 아이들은 그것을 왜 하는지도 모르고 당연히 즐거움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오래 지속할 수 없을 뿐더러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포기할 게 뻔하다. 성적을 올려서 좋은 대학에 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가는 건 이 기나긴 인생에 아주 짧은 소용일 뿐이다. 죽을 때까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그런 지혜를 가르치는 어른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좋은 친구는 나이와 상관이 없다. 서로에 대한 관심, 존중, 의리가 있다면 누구든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친구가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함께하려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얼마 전 꿈에서 깨어 남편에게 이 나이 먹어서 수다떨만한 친구 한 명 없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친구가 될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못한 나의 조급함 탓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수학의 아름다움에 빠져있는 영화 속 수학자처럼 나도 책과 글의 매력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사람 친구는 없더라도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으면 외롭지 않게 늙어갈 수 있을 것 같다.
Q.E.D. 증명 완료.
수학의 모든 풀이 과정을 마치고 마침표를 찍는 장면이 참 멋졌다. 지난한 과정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견뎌낸 자의 성취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탈고하며 원고지 마지막에 후회 없이 '원고 완료'라고 쓰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