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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Nov 13. 2022

엄마가 떠났다

엄마를 보내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떠났다. 4년 전에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고, 엄마 혼자 외로움을 견디다 결국 엄마도 아빠 곁으로 갔다. 엄마는 다친 다리를 일으키지 못하고 휠체어를 탔다. 그러다 앉아있는 것마저 힘들어하더니 침대에 누워만 있는 신세가 되었다. 코로나 전에는 네 형제가 번갈아가며 엄마의 말벗이 되었지만 코로나 이후 수시로 면회가 금지되면서 엄마는 말을 잃어갔다. 팥죽을 좋아하던 엄마는 그것마저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멀건 흰죽을 드셨다. 사위의 이름을 잊더니 손자들의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결국 그토록 자주 부르던 막내딸의 이름도 내 입술을 보며 나를 따라 읖조리게 되었다. 그래도 얼굴빛은 고왔고 눈빛은 맑았다. 그래서 좀 더 우리 곁에 있을 줄 알았다. 아직은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주 목요일, 수업 중에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수업 중이니 나중에 수업 끝나고 전화할까 했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받았다. "***씨 따님이시죠? 저... ***씨가 숨을 안 쉬어요. 아무래도 떠나신 것 같아요. 지금 바로 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 뭐라는 건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엄마 이름을 재차 확인하고, 그럴 리가 없지 않냐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되묻다가 지금 당장 가겠다는  말로 통화를 끝내는데 내 무릎이 꺾였다. 눈물이 터졌다. 당황해하는 아이들에게 아무래도 오늘 수업은 못 할 것 같으니 어머님께ㅣ 각자 연락드리라고 했다. 이미 내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학원 원장님과 실장님께 사정 얘기를 전했다. 뒷일을 부탁하고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엄마가 있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혼미해진 정신을 바로잡으며 운전대를 꼭 쥐었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가는 길에 불미스러운 사고라도 생기면 안되니까. 엄마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해야했다. 남동생과 큰언니, 작은언니 그리고 남편에게 눈물 섞인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요양병원으로 떠나기 전, 엄마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어서 심폐소생술을 부탁했다. 하지만 퇴근 길 가까운 시간이라 병원으로 가는 차는 내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병원에 다시 전화했다. 깨어날 가망이 없단다. 엄마의 깡마른 몸을 생각하며 그만하라고 했다. 나 가는 동안 그냥 편안히 있게 해달라고. 다시는 엄마와 눈을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눈물이 솟구쳤다. 차 안에서 엄마를 보냈다.



 요양병원에 도착해 엄마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시는 눈을 뜨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눈을 꼭 감고 있었지만, 얼굴빛은 그대로였다. 아직은 완전히 떠난 것 같지 않았다. 내 목소리를 들으면 힘겹게 눈을 뜰 것만 같았다. 엄마의 야윈 손을 잡고 엄마의 하얀 얼굴을 손으로 쓸어가며 막내딸 왔다고, 눈 좀 떠 보라고 속삭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다른 가족들이 곁에 있었다면 더 길게, 더 크게 울었을 텐데 대구, 천안, 서울에 있는 형제들과 제주도 출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며 보호자로서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코로나 때문에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요양병원에 들어올 수도 없는 상황, 빨리 장례식장으로 엄마를 옮겨야 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엄마 곁에서 여기저기 왔다갔다, 이곳저곳에 전화를 하며 엄마의 장례절차를 밟았다. 엄마를 잃은 슬픔은 형제들이 오면 함께 풀기로 미뤄둔 채 엄마의 마지막길을 준비하는 어른 자식의 역할을 수행했다. 코로나 시기, 요양병원에서의 죽음은 그 어느때보다 더 허망하다. 밤 늦게 장례식장이 정해지고 엄마의 빈소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차려졌다. 엄마가 저 세상으로 간 날, 나는 이 세상에서 저녁을 먹지 못했다. 잠도 푹 자지 못했다. 엄마가 떠났는데 아무일도 없다는 듯 먹고 자는 건 왠지 엄마가 서운해할 것만 같았다. 엄마의 입관식에서 큰언니가 서럽게 울었다. 아빠가 떠날 때는 그렇게 울지 않더니 몸이 아픈 언니에게 엄마의 죽음은 훨씬 큰 상실감이 되었나보다.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로했다.



 빠르게 진행된 장례절차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고, 나는 빠르게 엄마 잃은 슬픔을 잊어가는 중이다. 아빠와 나란히 납골당에 안치된 엄마는 요양병원에 혼자 있을 때보다 덜 외로워 보였다. 엄마는 생전에 아빠 없이는 산책도 나가지 못하고, 시장도 보지 못했다. 아빠가 이끄는 대로 살았던 엄마는 지금쯤 아빠를 만나,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 풀어내며 둘이 손잡고 여기저기 다니고 있을 것만 같다. 아빠엄마의 앨범을 보며 납골당에 넣을 사진을 고르고 있다. 지금 내 나이의 엄마아빠가 사진 속에서 다정히 웃고 있다. 엄마아빠가 나에게 말한다. 아프지 말라고, 잘 살라고, 행복해야 한다고, 그리고 천천히 오라고. 마음으로 대답한다. 그곳에서는 둘이 절대로 헤어지지 말라고, 아프지 말고 편안해야 한다고, 성실하고 소박했던 부모님 닮아 좋은 사람으로 살겠다고, 나중에 그곳에서 반갑게 만나자고.



오늘 우리 형제들 아빠엄마를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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