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좋은 책은 잠자고 있던 온갖 감정을 살려내어 책을 읽기 전과는 다른 나로 만들어놓는 책이다. 그런 책을 읽고나면 어제 봤던 사람들이 달리 보이고 그만그만했던 내 일상이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메타포라 10기로 3개월 동안 나의 글쓰기 선생님이었던은유의 인터뷰 산문《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를 읽으면서 '아, 좋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7명 번역가들의 독특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좋은 사람, 은유 작가의 시선과 언어로 참으로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시에 도착하는 사람들(은유)
은유 작가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시는 나를 나로 돌려놓는 마법이다'라고 했다. 메타포라 10기로 쉼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을 읽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시가 멀다. 그런데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를 읽으며 시가 가까워진 느낌이다. 은유의 말처럼 '자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기 힘을 동원하여 좋아하는 것을 남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번역가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시에 나도 좀 빠져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시가 나에게 나다운 글을 쓰게 하는 마법을 부릴 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즐거운 오해(호영)
"어려워서 재밌어요. 해볼 만하게 재밌는 것 같아요."
"책상에 붙어 있어야 되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가내 수공업 같은 이 과정을 견디려면 내게 그만한 즐거움을 주는 거여야 끝까지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습은 비슷하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 그건 몸의 명령이다. '너 이거 해라.' 거역할 수 없다.
어려워서 재밌는 것? 나에게는 요가가 그랬고, 요즘엔 새로 시작한 그룹 PT가 그렇다. 진즉에 운동으로 진로를 정해야 했나 싶다. 그렇다면 읽고 쓰는 건 어떤가? 책상에 붙어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걸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번역가들의 그것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아 주눅이 든다. 아이들과의 논술 수업에서 에너지를 쏟는 걸 즐기지만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고... 글쓰기가 어렵다. 그런데 재미는 잘 모르겠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거역할 수 없는 몸의 명령이라기보다는 잘 하고 싶은데 안돼서 안달이 난 것 같다. 요즘 나에겐 '글쓰기'가 큰 숙제다.
하지만 저는 해요(안톤 허)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의 한국어 공부법
"시를 많이 봐야죠. 한자가 중요한 것 같고요. 책을 많이 읽어요. 모든 걸 완벽하게 읽고 써야 된다는 강박을 안 가지려고 해요."
안톤이 너무나 좋아한다는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에서 뽑은 문장
"앎이란 모르는 상태를 견딜 수 있는 능력이에요. 모르는 걸 피하려 하지 마세요.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더 나쁜 거예요. 모르면 알 때까지 기다릴 수 있잖아요. 기다림은 힘들어도 좋은 거예요."
안톤이 '너무 좋은 책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번역했다는 《저주토끼》. 사실 나도 읽어본 적이 있지만 큰 감흥 없이 리뷰도 남기지 않고 지나쳤던 소설이다. 안톤을 끌어당겼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은유가 통으로 필사했다는 시집 《남해 금산》을 비롯해 안톤과 은유가 입을 모아 예찬하는 이성복 시인의 시집도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쌓이는데 시간은 항상 부족하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자식을 낳지 않았더라면, 하루종일 주방 근처에는 가지 않고 서재 책상에만 앉아 읽고 쓰는 일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면... 시간에서 나보다 훨씬 자유로워보이는 번역가들에게 괜스레 심통이 났다.
초과 선언(소제)
사랑하는 것을 더 잘 사랑하는 방법은 글쓰기다. 구체적으로 쓰기 위해 '그것'을 아주 오래오래 붙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보가 되는 것과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좋아한다."
"욕심냈는가, 몸을 사렸는가. 그 중간을 항상 주시하죠. 균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세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글이 영원히 기억될 가치를 가질 것인지, 단 몇 시간 만에 잊힐 만한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요즘 나는 글쓰기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다. '그래, 이걸 써야겠다' 하다가 중간에 지쳐서 결국 끝맺지 못한 글만 쌓여가고 있다. 시작은 있는데 끝이 없다. 한때는 과정을 온전히 즐긴 적도 있는데 지금은 글을 쓰는 일이 힘들고, 지루하고, 두렵고, 안타깝다. 그런데도 나는 글을 계속 써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내 속을 괴롭힌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점점 더 모르겠다. 내가 욕심을 내고 있는 건지, 몸을 사리고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다. 글쓰기에서 다시 길을 찾고 싶다.
동화가 잘되는 편(승미)
재난 이전과 이후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현실, 구멍 뚫린 사회가 조용히 침몰하는 "죽음의 완만함"이 어쩌면 우리가 겪는 재난이고, 공포이고, 고통인지도 모른다.
"가혹한 하루하루 속에서 무언가를 쓰는 것은 가능하다. 무력하지만 무의미하지는 않다." -파울 첼란
무엇을 쓰고 싶은지를 생각하다 왜 쓰고 싶은지를 묻게 되었다. 쓴다는 것은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나를 만들어가고 내 삶을 채워가는 그 과정을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애틋함이다. 나이가 들수록 잊히는 게 아쉽고 두렵다. 내가 무언가를 쓰면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 뒤에도 나를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내 모습은 잊어도 내가 품었던 생각이나 내 말은 전해질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나를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결국 나는 '나'를 알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똑바로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조금씩 나아지는 내가 되기 위해 쓴다.
반짝반짝 한국어(알차나)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힘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끊어내는 힘이 생긴 것.
"많은 언어를 할 줄 알면 뭔가 자유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저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을 제가 이해해 주고 싶어요."
사람과 삶에 대한 깊고 온전한 이해.
읽고 쓰기, 일에서 보람과 성취감 느끼기, 가족과 함께 맛있는 음식 먹기, 운동하기, 산책하기, 저축하기, 덜 마시고 덜 먹기.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알아간다. 잘 하는 것도 있고 잘 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꾸준히 하려고 노력한다. 뒤늦게 나에게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지 못할 때가 많지만 서로를 깊고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친구 한 명은 있었으면 싶다. 지금은 책과 남편만이 내 친구다.
엄마 이상 스피릿(새벽)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건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규범과 관성을 거스르는 일이라서 훨씬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성실하고 정직한 인간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싸운다.
사람의 일이란 게 그렇다. 혼자서 하는 것처럼 보여도 순전히 제힘으로 성사되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람은 관계의 날씨에 영향받는다. 도저히 못 할 것 같다고 굳어버린 마음도 적절한 계기가 주어지면 봄눈처럼 녹기도 한다.
"번역은 가장 깊게 읽고, 해석하면서 동시에 창작하는 일이죠."
"번역가는 자신의 원본 텍스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작가로 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 읽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감수성을 유지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싶고,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227
번역가 새벽의 이 말이 깊이 와 닿았다. 내가 읽고 쓰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작가로 살지는 못하더라도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 내 맘에 흡족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 읽고, 어떻게든 쓰려고 한다. 내 감수성을 유지하면서 정신 바짝 차리고 사는 것, 그렇다. 이게 정말 중요하다.
아름다움 교섭하기(박술)
당신은 자전거 산책을 나가도 시를 써 오지. 나는 시를 쓰려고 해도 빵밖에 구울 수 없어요. p.249 영화 <실비아> 대사
나는 이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돌봄의 세계에 남성도 속속 편입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이마저도 남성의 언어가 파급력을 갖고 공론화된다면 화가 날 것 같다.
금수저, 특권층의 번역가 박술이 육아에 대해 이야기하자 은유는 영화 <실비아>의 대사를 생각했다.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시인 테드 휴즈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다. 이혼 후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시를 쓰다가 서른한 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전남편 테드 휴즈는 영국 계관시인이 되었다. 결혼한 여자가 아이를 키우며 글 쓰는 일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은유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글쓰기 흉내만 내고 있는 나같은 사람도 집안일과 육아에서 자유로운 남자, 그것도 집안이 좋고 경제력까지 갖춘 사람이 글을 쓴다고 하면 그의 능력보다 조건이 크게 보이고 무척이나 부러울 테니까.
2,30대의 젊은 번역가들의 열정과 에너지가 읽고 쓰는 삶을 꿈꾸는, 50대의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의 글쓰기 선생님, 은유의 인터뷰 산문《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를 다 읽고나니 읽고 싶은 책들이 더 많아졌고, 엄살 그만 부리고 이제 정말 글을 써야지 싶다. 좋은 책을 읽고나면 부쩍 분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