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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Aug 23. 2023

나의 키다리 아저씨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입포리 84-2번지, 전화번호 375번. 내가 태어나고, 가난해지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내가 15살 때 ‘차범근 저리가라’였다는 나의 아버지 이희달씨(어렸을 때부터 키가 커서 별명이 키달이였단다)는 남다른 신체로 엄마와 함께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어린 남동생과 나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졌다. 매일 엄마 찾아 징징거리던 남동생은 며칠 안 돼서 부모님에게로 갔다. 나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막내 이모 방에서 지냈다. 혼자서도 버틸 자신이 있었다. 5일장을 돌며 장사하느라 바쁜 부모님보다 더 친근한 친구들이 있었다. 학교에 가면 나를 아껴주는 선생님들이 계시니 걱정할 것 없었다. 하지만 빚을 지고 떠난 부모님이 있으면 빚을 못 받고 남은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다.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아침이다. 눈을 떴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아주머니가 나를 마당으로 끌었다. 더 많은 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얼마나 따가운지 내 몸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내 머리맡에 계셨던 아주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용이, 너 나 알지?” 당연히 안다. 우리 반 동협이 엄마다. 동네에서 마주치면 공부 잘하고 예의도 바르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셨잖아요. “니 엄마아빠 어디에 있냐? 어디 있는지만 대.” 다른 분도 한마디 보탰다. “어서 대! 도대체 어디로 도망간 거야? 너는 알지?” 저는 모르는데요. “새끼가 어떻게 지 에미애비 있는 데를 모를 수가 있어?” 죄송하지만 정말 몰라요. 그리고 안다고 해도 제가 가르쳐드리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어른들은 내가 바른말을 할 때까지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야 뒷짐 지고 계시던 외할머니가 목소리를 내셨다. 애한테 그러지들 말라고, 진짜 쟤는 모른다고, 우리한테도 말 안 하고 갔다고, 나중에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좀 기다리라고. 하지만 그들의 절박함과 분노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 부모는 저분들께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도대체 돈을 얼마나 몇 명에게나 빚진 걸까, 그런데 나한테 왜 저러시나,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나중에 동협이 얼굴을 어떻게 보나, 짧은 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학교 갈 시간에 학교에 가지 못하면 뭘 해야 하나. 가정 시간에 하던 동양 자수 틀이 보였다. 저거다 싶었다. 오른손은 자수 틀 위에, 왼손은 아래에, 꽤 우아한 자세가 나왔다. 그런대로 시간을 보낼 만했다. 잠시 바깥세상과 단절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평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열 개 가까운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이번엔 내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저런 독한 년! 이런 상황에서 저런 걸 하고 있네.” “지 애비에미 닮아서 독한 것 좀 봐.” “그 에미에 그 딸여.” 고작 15살에 독한 년이 되었다.


‘끼이익’ 자전거 브레이크 밟는 소리다. 거칠다. 자전거가 넘어진 것 같다.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많이 듣던 목소리다. 문틈으로 담임 선생님의 벌건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을 알아본 어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기세를 몰아 선생님은 양손을 허리에 대고 레슬링으로 다져진 몸을 내밀며 소리치셨다. “애가 무슨 죄예요? 이런 문제는 어른들끼리 해결하셔야죠? 애 학교를 못 가게 하면 어쩌라는 겁니까?” 쭈뼛거리는 어른들을 밀쳐내고 선생님은 내 앞에 우뚝 섰다. “이주용! 빨리 가방 싸! 너 이 자식, 지각인 거 알지?” 당황했다. 반가웠다. 그런데 어쩌지? “빨리 안 튀어나와?” 튀어 나갔다. 선생님은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자전거를 우악스럽게 일으켜 세우더니 “빨리 안타고 뭐해? 꽉 잡아!” 하신다. 선생님의 넓은 등에 기대어 잠시 달렸다. 그 후로 선생님은 내 삼촌쯤 되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침밥 대신 눈칫밥으로 배를 채우고 학교에 갔다. 외가 식구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찍 등교했다. 한 학년 3반씩밖에 없는 시골 중학교 도서관이 내 안식처가 되었다. 낡은 도서관 책걸상은 당시 내 맘처럼 무언인가에 긁히고 파인 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그곳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도 하고 《키다리 아저씨》를 읽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가난한 신세가 되어버린 나를 주인공 ‘주디’라고 상상했다. 국수 두 그릇 먹었다고 나를 눈치도 철딱서니도 없는 천덕꾸러기로 몰아갔던 외할머니는 당연히 존 그리어 고아원의 리펫 원장으로 당첨! 키 크고 잘 생기고 게다가 돈까지 많은 키다리 아저씨만 ‘짠’하고 등장하면 완벽하다. 그때 익숙한 자전거 소리가 들렸다. 도서관 창문을 두드린다. 와장창! 키 작고, 얼굴은 내 스타일이 아닌데다 돈은 모르겠고 나이는 분명히 많은 삼촌, 아니 장태일 선생님이다. 무심하게 우유와 빵을 던져 주신다. 선생님은 매일 아침 외할머니 대신 내 아침을 챙기셨다. 환상은 깨졌지만 뱃속은 든든했다.


그해 12월 1일 첫눈 내리던 날, 나는 결국 부모님이 계신 인천으로 왔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나를 배웅하셨다. 고2까지였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손편지를 쓰셨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라고(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 아닌가요?), 너는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작가를 하라고(작가 아무나 하나요?), 아니 말을 잘하니까 선생님을 해도 좋겠다고(우리 친할머니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도 저를 진짜 아끼는 분들은 제가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가난한 현실은 너무 선명했고 선생님과의 추억은 희미해졌다.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어른들 말 틀린 거 하나 없다는 걸 증명하듯 나는 독한 년으로 살아남았다. 선생님 바람대로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고 있고, 작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글도 쓴다. 내가 처음으로 가난과 외로움에 맞닥뜨렸던 시절, 키달이 아버지 대신 내 곁을 지켜주셨던 나의 키다리 아저씨. 덕분에 나는 지금도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재미있는 요소를 찾아 웃을 줄 안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씩씩한 어른이 되었다. 다음  스승의 날엔 선생님께 꼭 문자를 드려야겠다. “선생님, 저 양화중학교 2학년 3반 이주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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