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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Nov 10. 2020

중년의 몸... 중년의 다이어트

중년 여성 작가들의 몸과 다이어트에 대한 조언

내가 중년이 되었구나를 실감하는 건 마음이 아닌 몸이다.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몸이 예전 같지 않아'라는 말을 내가 입에 달고 산다. 다리도, 눈도, 특히 몸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살들은 정말 내 것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다. 



중년의 몸


다리가 아프다. 오랜만에 보는 양털 구름과 파란 하늘에 흥분되어 너무 많이 걸은 탓이다. 주말에 남편과 인천 대공원을 걸었다. 인천 사람들 다 이 곳에 모였나 싶을 정도로 차도 막히고 공원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사람들의 들썩임에 동요되어 힘든 줄도 모르고 공원 곳곳을 걷고 또 걸었다. 나중에 더 나이 먹으면 이렇게 못 걸을 거라면서 아직은 튼튼한 두 다리를 뿌듯해 했고 한편으로 아쉬워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다. 남편도 나도 앓는 소리를 내며 잤다. 이제 욕심껏 걸을 수도 없다. 중년의 다리다.


눈은 침침하다. 책을 가까이하며 지내고 있지만 내 눈과 책 사이엔 거리가 있다.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30cm자로 이 정도는 띄고 책을 봐야한다고 하셨던 그 거리를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지키고 있다. 평소에 쓰던 안경을 벗고 책을 든 팔을 쭉 뻗어 초점을 맞춘다. 흐릿한 글자가 선명해지는 순간, 오차 범위가 크지 않은 딱 그 거리를 유지하며 팔꿈치를 책상에 고정하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도서관 책상 내 앞에 앉아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세다. 중년의 눈이다.


뱃살은 늘어졌다.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배 불리 먹었다는 것을 불룩한 배를 바라보며 확인하게 된다. 운동을 해도 큰 차이를 못 느끼겠다. 배에 힘을 주는데 늘어진 부분은 그대로다. 찰싹 달라붙지를 않는다. 중년의 나이에도 11자 복근, 식스팩을 만들고 유지하는 사람들은 배에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를 일이다. 나는 불룩한 윗배와 타협을 했다. 과식, 폭식, 과음은 하지 말자고. 탄력을 잃은 아랫배와 협상을 했다. 매일 요가를 하면서 뱃살이 더 아래를 향하게 하지는 말자고. 내 몸이 되어버린 뱃살을 야박하게 내칠 수 없게 돼버렸다. 중년의 배다.


그래도 다행이다. 중년의 몸을 받아들일 만큼 내 마음도 나이가 들어서. 봄에 화사하게 꽃을 피우는 나무도 어느 순간 꽃잎이 떨어지고 초록색의 옷을 갈색 옷으로 갈아입는 때가 온다. 초록의 싱그러움은 없지만 시간의 물이 든 단풍은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10대의 꿈, 20대의 청춘, 30대의 혈기왕성함은 멀어졌지만 40대 중년의 유연성으로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중년의 마음이다.


꽃잎은 모두 졌다. 나뭇잎도 힘없이 툭툭 떨어진다. 그들은 짧고도 화려했던 시간과 아쉬움 없이 이별한다. 내년 봄이면 어김없이 다시 꽃피울 수 있다는 여유다. 나무는 반복되는 생을 살아갈 수 있으니 지금의 삶에 미련을 두지 않는 듯하다. 지나간 청춘이 애달픈 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앙상한 가지에 눈꽃을 피운 겨울나무처럼 머지않아 노년의 시간이 올 것이다. 두려움보다는 그때 추억하는 내 중년의 시간이 좀 더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중년의 몸은 안타깝지만 중년의 마음은 비교적 평온하다. 좋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아침, 고단한 몸은 쉬고 지친 마음을 가다듬는 중년의 휴식 시간이다.




매번 빡세게 다이어트하자던 계획은 며칠 만에 실패로 돌아간다. 아무래도 '빡세게'는 틀린 것 같다. '도대체 이 몸을 어쩌란 말이냐' 싶을 때 나처럼 중년이 된 여성 작가들의 조언이 도움이 된다.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한번 살이 찌기 시작하면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몸이 “아, 이제 살이 쪄도 상관없다는 거지?”라며 의기양양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살찌면 안 돼!”라고 못을 박아 자극을 줘야만 한다. 여기서 “뭐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느슨해지면 체중은 상승 곡선을 타게 된다. 살이 굉장히 쉽게 찌고 굉장히 빼기 힘들다. 이것이 갱년기의 나다. 

『그렇게 중년이 된다』, <체중 측정 다이어트> 중에

요즘 내 몸이 딱 이렇다. 쉽게 찌고 안 빠진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살까지 내게 찰싹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질 않는다. 나이 들수록 몸도 마음도 가볍게 살고 싶었는데 몸이 무거우니 마음도 천근만근이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안고, ‘가볍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살아온 시간 속에서 알게 된 슬픔과 아픔은 나를 깊게 해주는 경험으로 소중하게 끌어안고. 내가 생각하는 이후의 가벼움은 그런 가벼움입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해도 괜찮습니다 > 중에

함께 다독이며 살아가야 할 일은 앞으로도 여러 가지가 생길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화가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처음 일어나는 일은 ‘특별’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람마다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지나는 길입니다. 지나치게 크게 받아들이지 않고,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하면서 새로운 경험으로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변해가는 몸의 상태를 받아들입니다> 중에

갈림길에 멈춰 섰을 때처럼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자신이 ‘웃으며 지낼 수 있는’ 쪽을 선택합니다. 지금 웃는 얼굴로 있을 수 있는 쪽. 그리고 이후에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은 쪽을.
마음이 흐려지는 일, 자기 스스로를 억지로 설득시켜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는, 그 일이 정말로 필요한 일인지 먼저 ‘내게’ 물어봅니다.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걸로 된 거고, 우울해질 것 같다면 다른 상황에 있는 자신을 선택합니다.
마음도 짐도 가벼운 편이 걷기 쉽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걷기 편함’은 중요해집니다. 웃는 얼굴로 걸을 수 있도록 해야 앞으로의 여정이 즐거워집니다. 너무 즐거워서, 너무 웃어서 눈가에 주름이 생긴다면 그건 무척이나 멋진 일입니다.
<언제나 웃을 수 있는 쪽을 선택합니다> 중에

『어쩌다 보니 50살이네요』 중에서

젊어본 적은 있지만 늙는 건 처음이니 변해가는 내 몸이 당황스러운 건 당연한 거겠지. 어차피 세월은 오지 않고 가기만 할 테고 내 몸은 점점 내 맘대로 되지 않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다만 중년의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몸관리는 꾸준히 하기로 마음먹는다. 

여간해서는 체중도 줄지 않는다. 한 끼를 거르거나 운동을 격렬하게 하면 예전에는 체중이 금세 줄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 오싹할 만큼 일정하다. 신기한 것은 줄어도 이튿날이면 일정한 수치로 금방 돌아오는데, 늘면 이번에는 그 숫자가 일정한 수치가 된다는 사실이다. 저녁을 가볍게 먹어서 1킬로그램이 줄어도 이튿날에는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런데 야심한 시간에 참다못해 라면을 먹어서 2킬로그램이 늘면 이번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체중이 줄지 않는다 참으로 얄미운 구조다.

『무심하게 산다』, 프롤로그 중에

나만 이런 게 아니었다. 중년이 된 후부터 진짜 체중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가 없다. 며칠 먹고 싶은 거 참고 견뎌서 2kg 가까이 줄면 '그래, 이렇게 빼면 되는 거야' 했다가 하루 저녁 한 끼 배불리 먹고 나면 다시 제자리, 아니 오히려 더 찔 때도 있다. 며칠 참고 한 끼 잘 먹었을 뿐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면 우선 자신과 잘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우리를 담는 ‘몸’이라는 그릇은 인격과 마찬가지로 개성이 철철 넘친다.그리고 실로 중요한 사실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성공하는 다이어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창고만 마냥 감아서는, 한 가지 음식만 주구장창 먹어서는, 밥을 쫄쫄 굶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체질을 가지고 있고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든지 효과가 없다. 『무심하게 산다』, <다이어트의 진실과 거짓> 중에

단기간에 살을 빼는 극단적인 방식은 오래 지속할 수 없으니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나에게 맞는 다이어트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이다. 중년의 몸으로 중년의 다이어트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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