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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Feb 03. 2024

작은 아파트, 큰 정원

우리 집 정원, 청량산!

우리 집은 30년 된 24평 아파트다. 남편이 군대 제대하고 살기 시작해서 우리가 결혼하고 시부모님, 시동생과 함께 살았고 우리 큰아들 낳고도 이 집 안방에서 기저귀를 갈았다. 한동안 우리 네 식구 다른 곳에 살았지만 시부모님이 모두 떠나시고 우리는 이 아파트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낡아서 여기저기 손보기는 했지만 우리 집은 오랜 시간 만큼이나 우리만의 스토리가 있고 끈끈한 정이 들었고 짙은 감성이 깃든, 소중한 보금자리다. 우리 집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넓은 정원이다. 아파트를 나와 조금만 걸으면 동네 청량산이다. 나는 우리 동네 청량산을 우리 집 정원이라 부르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이 늘어진다.



집에서 정상에 오르는 데 3,40분이면 된다. 비교적 가파른 길을 택해 정상에 오르거나 둘레길로 한 바퀴 돌거나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코스를 고르면 된다.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운동을 하지 못하는 남편은 둘레길을 선호하고 나는 '그래도 정상'을 고집하는 편이다. 겨울 치고는 요즘 날씨가 너무 푹해서 이른 아침에도 산에 오르는 옷차림이 무겁지 않다. 추운 날에도 산 입구에서 10분만 오르면 외투의 지퍼를 내리게 되고 정상에 오르기 전에 땀이 나기도 한다. 요가원에 다녀보기도 하고 헬스장에도 가 본 적도 있고 최근에는 그룹 P.T라는 것도 경험해 봤지만 돌고돌아 원점이다. 결국 청량산 산책이 나의 운동 습관으로 자리잡는다.



매일 가는 청량산이지만 매일 다르다. 집을 나설 때 하늘은 어제와 다르고 정상에서의 하늘은 밑에서 보는 하늘과 또 다르다. 요즘은 내 마음이 재수생 둘째아들의 대학 합격 발표로 꽉 들어차 있다. 그래서인지 내 머리 위에서 지저귀는 까치 소리가 보통 때와는 다르게 들린다. "합격! 합격이야!"라고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듯하다. "좋은 소식 전해줘서 고마워."라고 화답한다. 정상에서 500개가 넘는 계단을 내려오다보면 호불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다. 전에는 정상에서 그냥 내려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최근 일주일 동안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호불사를 거쳐 둘레길로 돌아 온다. 아들의 합격 기원을 위해서다. 겨울 아침에는 절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입으로 소리내어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고생한 우리 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세요. 착한 아이입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거예요. 소란스럽지 않은 우리 아들이 환하게 웃는 얼굴 보고 싶습니다. 제발..." 두 손 모아 머리를 숙인다. 다른 어느 때보다 오래오래.



종교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소원을 들어달라고 떼쓰듯 신께 매달리지만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들 것 같지는 않다.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진다. 나처럼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소원을 빌었을까 싶다. 어떤 사람은 생사를 오가는 간절한 사연이 있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우리 아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시도한 일의 성공을 바라기도 했을 것이다. 간절함의 경중을 따지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신께서 생각하시는 우선 순위라는 건 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엄마로서 아들의 합격을 간절히 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결과라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한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아들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겠지만 혹여 안 좋은 소식이더라도 나는 아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토닥이며 아낌없는 위로와 격려와 응원을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집이 좋다. 내 돈과 노력을 들여서 가꾼 곳은 아니지만 청량산이라는 넓디 넓은 정원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을 때는 신이 나서 단숨에 오르게 되고, 우울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는 속도를 늦추어 한 걸음 한 걸음 시름을 풀어 놓는다. 나의 정원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기 다른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다. 지루할 틈이 없다. 해준 것도 없이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나 싶어 산을 내려오고나면 내 마음엔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일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겸손해진다. 수업이 많은 오늘도 아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마음에 기어코 청량산에 다녀왔지만 집에 도착할 즈음엔 '제발'이라는 절박한 외침보다는 '괜찮아'라는 차분한 목소리가 내안에서 들려왔다. 오늘도 청량산이 자기 역할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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