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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Feb 10. 2024

우리 부부, 하루 수원 데이트

구경하며 걷기 좋은 길, 수원 행리단길!

나이가 들수록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편하다. 속내까지 보일 만한 친구 하나가 곁에 없다거나 형제간의 왕래가 잦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우리 남편의 무던한 성격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친구 역할은 물론 형제간보다 더 끈끈한 정을 느끼게 해주니 남편과 단둘이 가는 곳은 어디든 좋다. 설 연휴 전에 남편은 이틀 더 휴가를 냈다. 입시 발표가 난 둘째아들, 열흘 전에 전역한 큰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나와 함께하고 싶었다고 했다. 수요일 저녁엔 네 식구가 함께 저녁 외식을 했다. 입시 결과가 좋지 않은 둘째를 위로하고,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온 큰아들을 축하했다. 앞으로 우리 식구 잘해보자고 '파이팅!'을 외치는 자리였다. 하지만 큰아들이 우리 부부의 배려와 호의가 부담스럽고 불편했다고 폭탄 발언을 하는 바람에 남편과 나는 빠르게 섭섭함을 털어내고 평정심을 찾느라 허둥댔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좋다는 남편의 훈훈한 멘트로 외식 자리는 총총히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목요일 아침, 우리 부부는 일찍 집을 나섰다. 전날 계획한 것도 아닌데 약속한 것처럼 우리 둘은 두 아들과 거리두기를 하는데 동의하고 하루 둘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남편이 차는 두고 전철을 이용해 수원에 가잔다. 무조건 좋다고 했다. 수원 화성에 두 번 다녀오기도 했고, 수원 팔달문 근처 시장 구경도 해봤고, 그 주변에서 순대국과 통닭도 먹어봤다. 그런데도 또 수원에 가자는 남편의 제안에 선뜻 응한 건 생각보다 수원이 구경거리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루 남편과 집을 떠나 아니, 아들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어디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집 근처 역에서 1시간 정도 전철을 타고 가면 수원역에 도착한다. 나는 다 읽지 못한 박완서의 『오만과 몽상』을 전철에서 마저 읽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아무리 먼 거리를 가더라도 책 한 권이면 지루함 없이 다닐 수 있다. 


수원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팔달문에서 내린다. 팔달문 주변엔 오래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재래 시장이 있다. 길거리에서부터 시장 안까지 설을 앞둔 상인들과 손님들로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원래부터 시장을 좋아하는 나를 따라 남편도 시장 구경을 좋아하게 되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과 기름 냄새 물씬 풍기는 다양한 전, 벌건 살을 부끄럼 없이 내놓은 고깃 덩어리들과 각종 나물과 반찬들, 그야말로 눈 돌리는 곳마다 구경거리 천지였다. 가격은 말도 안되게 착하다. 차를 가지고 갔더라면 지갑을 여러 번 열었겠지만 그날은 눈요기만으로 만족하고 명절 느낌을 제대로 만끽했다. 차례를 안 지내는 집도 많고, 시골에 내려가는 대신 해외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요즘. 재래시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 분위기에 우리 부부는 함께 들썩였다. 나는 화려한 쇼핑몰보다 소박한 시장에 있을 때가 훨씬 편하고 많이 웃게 된다. 


시장 구경을 하다보니 배가 고파 근처 순대타운에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씩 마셨다. 수원 지동시장 순대타운의 순대국은 어느 집을 가도 맛있다. 모든 식당이 기본 이상은 하기 때문에 맛의 실패란 없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본격적으로 수원 구경을 시작한다. 수원엔 전통시장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지동시장, 팔달문 시장, 수원남문시장, 수원영동시장 등 시장만 돌아다녀도 한 나절이 다 지날 정도다. 나처럼 재래 시장 덕후들에게 수원은 데이트 코스로 딱이다. 시장 구경을 어느 정도 했다 싶을 때 우리는 다리도 쉴 겸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오래된 한옥 스타일 외관에 <메모리아 마넷>이라고 이름이 달려있다. 차를 두고온 우리는 주차 걱정 없이 카페 안으로 부드럽게 입장이다. 



은은한 조명이 한옥과 잘 어울린다. 카페 주인장은 여유있는 양반 스타일이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이어서인지 카페 안은 한산하다. 햇빛 좋은 1층 자리에 앉아 남편과 나의 취향에 따라 아메리카노 마일드와 스트롱을 각각 주문했다. 적당한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팝송도 듣기 좋다. 커피 몇 모금 마시더니 남편은 곧장 잠시 졸 태세를 취한다. 다리를 뻗고 편히 쉴 수 있게 해주고 나는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여리게 들렸지만 우리만 있는 공간이라 맘편히 잘 수 있게 두었다. 평일 한낮, 남편과 차 한 잔 마시며 서로에게 맞는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그대로 평온이고 행복이다. 욕심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딱 이만큼의 여유와 행복이면 된다고 말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달게 낮잠을 자고 일어난 남편과 수원 행리단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말이 아니라 한산해서 우리만의 속도로 걷기에 적당했다. 특색있는 가게들이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다. 남편이 맘에 드는 가방을 하나 사 주었다. 그때의 나는 사랑받는 아내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독특한 소품 가게를 구경하기도 하고 다양한 먹거리 식당 앞에서 메뉴판을 읽기도 했다. 출출한 김에 낮술 한 잔 할까 했지만 대부분의 식당이 3시 쯤 브레이크 타임을 두고 있어 만만치 않았다. 걷다보니 <책고집>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어디선가 보았던 이름인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책과 연관된 것은 무엇이든 눈이 먼저 간다. 2층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최준영 대표가 운영하는 북카페다. 내가 좋아하는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최근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요즘『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있어서인지 아는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책을 뒤적이는 나에게 남편이 "책 한 권 살까?" 묻는다. 최준영 대표의 신간도 있었지만 남편은 오래 전에 출간된 『결핍을 즐겨라』가 더 맘에 드는 눈치다. 한 권 사서 읽어보기로 했다. 직원에게 물으니 책이 있는지 대표님께 물어보고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다. 달려와 책장에서 책을 꺼내 계산하며 "대표님께서 고맙다고 책 값 3,000원 할인해서 만 원만 결제라하고 하시네요." 한다. 훈훈한 마음으로 책을 사들고 나왔다. 



집으로 그냥 가기에는 아쉽고, 배도 좀 고플 것 같아 행궁을 지나 팔달문으로 가는 길에 아구찜 집에 들어갔다. 4시 오픈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3시 좀 넘은 시간에 빼꼼히 문을 연 나에게 주인장이 어서 들어오라고 반긴다. 우리 부부 손님 한 명 없는 조용한 식당에서 아구찜에 볶음밥까지 주문해서 식사와 반주를 곁들였다. 이렇게 우리는 수원에서의 데이트를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수원은 구경거리도 많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좀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 들어 좋다. 상인들도 심하게 호객 행위를 하지 않고 어느 가게를 들어가도 주인장들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예술가들이 많이 활동하는 곳이라는데 그래서일까. 수원 화성 주변으로 높지 않은 건물들도 맘에 든다. 


  


우리 부부의 수원 데이트 기록의 마무리는 '책고집'의 최준영 대표의 책『결핍을 즐겨라』의 뒷표지의 문장으로 대신한다. 우리 네 식구가 마음에 새겼으면 하는 말이다. 재수까지 했는데 대학 문턱에 발을 들이지 못한 우리 작은아들과 군대 전역하고 아직 복학과 휴학을 결정하지 못한 채 생각 많은 우리 큰아들,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길에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점점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 우리 부부. 우리 가족 모두 각자가 갖고 있는 상처를 극복하고 힘차게 다음 한 걸음을 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눈 감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문신처럼 박힌, 내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더라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한 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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