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말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다.
클레어 키건의 신간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4)을 읽고 2009년 출간된 『맡겨진 소녀』를 빌려와 읽었다. 100페이지가 안되는 소설이라 하루 만에, 부담 없이 읽었다. 아일랜드 작가의 소설은 내가 기억하기로 클레어 키건이 처음인 것 같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아일랜드의 어두운 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아이들이 가난과 외로움에 떨고 있을까. 엄마가 된 이후로 아이들의 고통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하게 나를 찌른다.
내가 정리한 이야기의 줄거리
나(초등학생 저학년 정도의 어린 소녀)는 가난한 집안의 사정상 엄마의 먼 친척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다. 언니들과 남동생, 태어날 아이까지 돌보느라 힘겨운 엄마와 돈을 버는 능력은 별로 없는 아빠의 궁여지책이다. 킨셀라 부부는 조용한 집안에 찾아온 소녀를 수선스럽지는 않지만 다정하게 맞이하고 돌본다. 말이 많지 않은 세 사람이지만 함께 밥먹고 집안일을 나눠하며 정을 쌓아간다. 지인의 장례식에 가게 된 날, 나는 이웃에게 킨셀라 부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때문에 아들이 수렁에 빠져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소녀가 집에 돌아가는 날까지 그들은 새옷과 신발을 사주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엄마아빠가 있는 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한 사랑을 느꼈던 나는 집으로 돌아온 날, 아저씨에게 달려가 안기고 아주머니의 흐느낌을 듣는다. 아저씨의 품에서 나는 '아빠'라고 그를 부른다.
최근에 읽은 소설들이 대부분 '말없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살면서 너무 많은 말을 내뱉은 내게 이제 좀 조용히 살면 어떻겠냐고 권하는 듯, 소설을 읽는 내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사람들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다. 말로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할 것은 전해지고, 어떤 때에는 말보다 표정과 행동이 그리고 함께나눈 시간의 농도가 관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소녀는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말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언니들, 남동생, 엄마와 아빠가 북적거리는 집이었지만 소녀는 누구와도 긴 대화를 하지 않았다. 묻기는커녕 아무런 설명도 없이 부모의 결정에 의해 낯선 환경에, 처음보는 노부부에게 맡겨졌다. 다행인 건 집보다 훨씬 깨끗하고 경제적으로도 나은 환경이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위생적인 곳이고, 무뚝뚝하지만 속깊은 아저씨와 존중과 친절이 몸에 밴 아주머니의 온기가 있는 집이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p.24~25)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 30)
처음에는 약간 어려운 단어 때문에 쩔쩔맸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추거나 비슷하게 맞출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나는 짐작으로 맞출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그런 식으로 계속 읽어나갔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 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 p.83)
킨셀라 아저씨가 침묵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가장 밑줄 치고 싶은 구절이었다. 아들을 잃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댄 이웃 때문에 상처 받은 아주머니와 아저씨. 소녀는 위로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 소녀에게 아저씨는 애써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오히려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가 더 많다고 말한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p.73
소녀가 킨셀라 부부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 여름 한두 달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소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고 아들을 잃은 노부부는 잠시나마 부모의 역할을 함으로써 위안을 받은 것 같다. 소녀가 마지막에 달려가 아저씨에게 안겨서 "아빠"라고 부르며 소설은 끝이 난다. 그들의 조용한 이별 의식이 오래오래 기억될 듯하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원작으로 2022년에 영화가 제작되었다고 해서 이어서 보기로 했다. 영화의 제목이 <말없는 소녀>다. 요즘엔 이렇게 잔잔하고 조용한 영화가 끌린다. <퍼펙트 데이즈>처럼.